노르웨이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부회장인 알비드 할아버지, 핀 할아버지와 전쟁박물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알비드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기념비 앞에서 아리랑을 한국말로 정확하게 불러 주셨다
한국 국립의료원의 뿌리인 노르메시의 나라 노르웨이
나는 별로 ‘우연의 일치’를 믿지 않는 편인데, 노르웨이 방문은 몇 년 전 이미 준비됐던 것같은 ‘우연한 인연’ 덕을 많이 봤다. 2012년 봄학기 의원실(찰스 랭글)에서 일할 인턴 학생을 뽑았다. 미국 의회 의원들은 외국인 인턴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아메리칸 대학 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오슬로에서 온 유학생에게 미국 의회에서 일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일을 잘하고 성실해서 둘이서 식사도 자주하고 잘해줬었다.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노르웨이 방문을 준비하며 줄리에게 연락했더니 마침 오슬로 시내에 살면서 법대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줄리가 거주하는 아파트에 마침 (우연히도!) 빈 방이 하나 있어서 숙소 문제와 길안내 등 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오슬로에 도착한 다음 날인 2월 16일 노르웨이의 참전용사를 만났다. 줄리가 현지 참전용사협회와 사전에 연락해서 인터뷰 약속 잡고 방문할 장소도 예약을 해뒀기 때문에 편안하게 다닐 수 있었다. 노르웨이참전군협회 부회장인 알비드(Arvid) 할아버지와 핀(Finn) 할아버지를 오슬로의 전쟁박물관에서 만났다. 노르웨이는 한국전쟁에 624명을 파병했는데 100명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나머지는 의료인을 보호하는 군인들이었다. 알비드 할아버지는 의료진 호위대 출신이고 핀 할아버지는 수술실에서 근무했다.
알비드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4번이나 방문하셨는데 최근 함께 방문했던 95세 간호장교로 참전한 할머니 이야기를 해 주셨다. 노르웨이 야전 병원이 있었던 의정부에서 열린 참전기념비 제막 행사였는데 어떤 한국인 남자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11살에 얼굴을 크게 다쳤는데 할머니가 꿰매줬다면서 노르웨이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간호사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시 치료하던 모습의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는데 의정부 시에서 그 사진 속의 치료받은 사람을 찾아서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할머니를 만나게 해 주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부른 아리랑
알비드 할아버지와 핀 할아버지와 함께 전쟁박물관 앞의 한국전쟁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기념비에는 한국어와 영어, 노르웨이 어로 “노르웨이 야전병원 NORMASH에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총 623명의 노르웨이인이 근무하였으며 미군 제8군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의정부에 설립된NORMASH는 그 후 최전방인 동두천으로 이전하며 9만 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그 중 1만4천755명은 입원치료를 받았고 만여 명은 수술치료를 받았다. NORMASH는이러한 활동으로 대한민국 대통령표창장을 수상했고 미국 공로상을 두 번 수상했다”라고 씌여 있었다.
알비드 할아버지는 기념비 앞에서 유창하게 한국말로 ‘아리랑’을 불러주셨다. 60년 넘게 불렀다고 하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불러 주셨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만난 한국 사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서로 가르쳐 주는 것으로 소통했다고 하셨다. 한국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아리랑을 그리고 할아버지는 한국사람들에게 노르웨이 전통동요를 가르쳤다고 했다. 알비드 할아버지는 한국 그 어디서엔가65년 전 노르웨이에서 온 군인에게 배운 노르웨이 전통동요를 기억하고 부르는 한국사람의 모습을 가끔 상상하신다고 하셨다.
핀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도 흥미롭게 들었다. 한국전쟁이 그 분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꿨다면서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평생을 함께 살아 온 사연을 소개해주셨다. 야전병원에서 만난 한국 간호사를 잊지 못해서 1957년 노르웨이로의 유학을 주선했고 4년 뒤인 1961년 결혼해서 지금까지 아주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고 멋쩍게 웃으셨다.
국립의료원 개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파우스 박사의 딸인 루씨와 함께 방문한 ‘평화의 종’ 공원.
노르웨이에서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다.
오슬로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노르웨이가 참전한 해외전쟁과 관련한 기록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어서 한국전만 전시하진 않았지만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며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박물관인 스미소니언의 역사박물관에서도 한국전을 특별하게 전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전군부대의 진한 녹색침대와 그 당시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의료 기계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며 그동안 내가 방문했던 한국전 참전국들은 기념비 정도만 있었을 뿐 한국전쟁이 여전히 ‘잊혀진 전쟁’으로 남아 있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한국전쟁의 생생한 현장을 재현하며 전쟁의 교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에 부럽고 놀라웠다. 핀 할아버지는 첫 유엔 사무총장이 노르웨이 출신이었는데 한국전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이 많이 알려졌고 노르웨이 총장을 돕기 위해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한국전 참전에 자원했던 면도 있었다고 설명하셨다.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5월18일) 노르웨이 참전군의 딸인 루씨는 줄리와 나를 오슬로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평화의 종’이 있는 곳인데 2014년 8월 15일 세워졌다고 한다. 평화의 종은 스웨덴, 노르웨이, 한국 세 나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스웨덴과 한국에서 먼저 생겼고 몇 해 전 노르웨이에서 마지막으로 같은 모양의 건물과 종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쉽게도 안개가 너무 많아서 오슬로 전경은 볼 수 없었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 한국과 스웨덴, 노르웨이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평화의 종이 있다는 게 뿌듯했다. 루씨는 한국에 가서 평화의 종을 찾아볼 것을 권했고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루씨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먼저 한국전에 참전했던 파우스 가문의 딸이다. 파우스 박사는 1951년부터 58년까지 한국에 근무하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가 한국에 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인 국립의료원을 세우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분이다.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 식사는 오슬로의 유일한 평통 위원인 김소영 씨와 한국 대사관의 참사관과 함께 했다. 혼자 여행하며 외로운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분을 만나면 너무나도 반갑다. 특히 소영 언니처럼 한국의 멋과 정신을 현지 사람들과 나누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이 더욱 커진다.
소영 언니는 노르웨이 한국학교가 정부의 인가를 받아 정식 교육기관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노르웨이에 있는 한글학교는 한국아이들보다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더 많이 등록해서 한글을 배운다고 한다. 한국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을 가슴에 품으며 자랑스러운 한국을 홍보하는 소영 언니의 기운을 안고 일곱 번째 방문국으로 떠난다. 다음 목적지는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쳐 스칸디나비아의 마지막 나라인 덴마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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