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노처녀’였을 때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로라 할머니. 지금은 103세다.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해
수만명을 치료했던 스웨덴에서
나 역시, 몸도 마음도 치유받았다
1. 의료지원국으로 가장 빨리 참전한 스웨덴 (2/11 -2/14)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 공항에 내리자 영어가 통하는 곳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계신 LA를 떠난지 4주째가 되는 날이었는데 러시아에 있는 동안 극도로 긴장을 해서인지,아니면 생전 처음 경험했던 매서운 러시아의 강추위 때문이었는지, 비행기에서 내려서 마중 나오신 스웨덴인 부부를 만날 때까지 이동하며 가벼운 몸살 기운을 느꼈다.
스웨덴-한국협회 (Swedish-Korean Association) 회장인 라스 프리스크 부부는 나를 스톡홀름 도심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로 데려가 주셨다. 프리스크 부부는 내가 스톡홀름에 머무르는 사흘 내내 참전군인을 만나고 한국전쟁과 관련한 장소를 찾아갈 수 있게 계획을 세워주셨다. 파란 하늘과 스톡홀름을 둘러싸고 있는 더 파란 바다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근처에는 스웨덴이 참전했던 전쟁과 관련한 기록을 전시한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이 있었는데 기념비의 이름이 라틴어로 레스따레(Restare) 우리말로는 ‘쉬다, 쉼’이라는 뜻이었다. 한 달 동안의 쉼없는 여정을 달래주는 느낌도 들었다.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 숙소를 제공해 주신 분은 70 대 중반의 노부부였는데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보건복지부 공무원으로 일하시면서 입양을 원하는 부부를 인터뷰하고 입양 과정을 지원하는 일을 하셨다. 스웨덴도 미국 처럼 한국전쟁 이후 국제 입양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분이 담당했던 첫 입양아이들이 전쟁 고아인 한국출신이었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한국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서 한국전쟁 참전군인을 만나기 위해 전세계를 방문하는 나를 기쁜 마음으로 돕게 되었다고 하셨다.
92세 내과의사 올센 할아버지가 주신 한국전쟁 당시 사진들. 컬러 사진이라는 게 이채롭다.
2. 미군을 제외한 유일한 한반도 주둔군 스웨덴
스웨덴은 한국전쟁 당시 ‘의료적인 지원’을 해준 국가다. 한국전쟁에 의료지원으로 참전했던 나라는 스웨덴을 비롯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그리고 이탈리아 등 총 5개국이다. 스웨덴은 의료지원국 중 가장 빠른 시기인 1950년 9월 23일 총 160여 명의 의료요원들을 파견하여 9월 28일 부산에서 야전 병원을 열어 전쟁 이후 1957년까지 유엔 연합군 뿐만 아니라 민간인, 북한과 중공군 포로까지 치료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은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나라다. 한반도의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스웨덴 군인 5명이 판문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3. 간호장교 출신인 103세 ‘소녀’ 로라 할머니
내가 만난 스웨덴의 첫 번째 한국전 참전군인은 103세 로라 이마뉴엘 할머니다. 로라 할머니는 2시간도 넘게 인터뷰에 응해 주시며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억을 말씀해 주셨다. 한국전쟁에 참전할 때 할머니의 나이는 35세였다. 대학원을 이미 졸업한 대위 계급의 ‘노처녀’셨다. 부산에서 근무한 1년 동안 야전병원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노처녀 대위’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추억하셨다. 한국을 떠날 때 환자들이 돈을 모아서 진주목걸이까지 선물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목걸이를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면서 직접 보여주셨다. 할머니는 스웨덴 의사와 간호사들이 야전병상의 유엔 연합군 환자들 돌보면서 시간이 날때마다 부산 시내의 피난민들이 사는 지역을 방문해서 민간인 환자들을 치료해줬다고 했다.
스웨덴 의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 기록영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를 제작 중인 프리스크 스웨덴-한국협회 회장.
4. 한국전쟁의 참사를 칼라사진으로 담았던 92세 내과 의사
둘째날에는 92세 할아버지와 인터뷰했다. 내과 의사인 폴 올센 할아버지는 간호사였던 부인과 함께 부산 야전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봤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시로는 드물게 칼라사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덕에 1950년대 부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담았다고 하시면서 상당량을 디지탈 형식으로 나에게 주셨다. 올센 할아버지가 건네주신 사진에는 끔찍할 정도로 가난한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할아버지는 스웨덴으로 돌아온 뒤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의 발전과 변화한 모습에 너무나도 자랑스러우셨다고 했다. 야전병원이 있었던 부산이 전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사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면서 믿기 어려운 기적을 만든 한국사람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스웨덴은 한국전쟁 당시 1천124명의 의료진을 한국에 파병했는데 다행히도 한 분도 다치거나 돌아가신 분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5. 야전병원의 엔터테이너 95세 신부님
스웨덴에서의 마지막 인터뷰는 95세의 신부님이었다. 목사 친구의 부탁으로 대신 한국에 갔다고 말씀하셨다. 전쟁 이후에 도서관에서 오랜동안 근무하셔서 인지 당시의 기록을 철저하게 남겨두셨다. 목사님으로 계시면서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참전용사의 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 오락을 책임지셨다는 일화도 소개해 주셨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스웨덴 말을 영어로 번역해서 열창해 주셨다. 신부님 할어버지는 전장에서 매주 주간지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전쟁 상황과 관련한 뉴스 뿐만 아니라 참전용사들의 재미난 사연들도 담았다고 하셨다.
스웨덴에 있는‘유일한’ 한국전쟁 기념 동판’ . 스톡홀름 경찰학교에 있다.
6. 스톡홀름 증후군?- 달콤했던 스웨덴에서의 발렌타인데이
스톡홀름을 추억하면 달콤한 기억이다. 스웨덴에서 만난 할머니와 할어버지, 이모, 삼촌들 덕분에 내 생애 최고의 ‘발렌타인데이’를 보냈기 때문이다. 스웨덴-한국협회 (Swedish-Korean Association) 회장인 프리스크 부부는 나와 함께 2월 14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해주셨다. 프리스크 씨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중립국감시위원단’으로 판문점에서 근무하신 인연으로 한국전참전군인들을 지원하는 스-한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스웨덴 의회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 기록영화도 제작 중이다.
사흘 동안 숙소를 제공해 주신 잉그리드 부부는 내가 라스 부부와의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자’ 너무나도 맛있는 발렌타인 요리를 내어주셨다.
스웨덴을 떠나기 직전 스톡홀름에 유일하게 있는 ‘한국전쟁기념동판’이 있다는 경찰학교에 들러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으로 가기 전 야전병원에 근무할 스웨덴 군의관들과 간호사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군인의 노력으로 1996년 세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잊혀진’ 전쟁으로 여겼던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록을 지키고 희생자를 기리며 전쟁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스웨덴을 비롯한 모든 방문한 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품고 다음 나라인 92세노르웨이로 이동한다.
의료지원국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 만명을 치료했던 스웨덴에서 나 역시 몸도 마음도 치유 받았다.
◆후원금 접수처= https://www.generosity.com/volunteer-fundraising/thank-document-korean-war-vets-around-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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