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 땅거미 지는 공터.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뚫고 이 집 저 집에서 엄마들이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 엄마가 외치는 ‘밥 먹자 - ‘ 소리에 집으로 달려가면 생선 굽는 냄새, 찌개 끓는 냄새가 현관문 밖에서부터 ‘오늘의 메뉴’를 알려준다. 온 식구가 둥근 상에 둘러앉으면 스멀스멀 찾아드는 나른한 행복감.
중년층 이상이면 누구나 갖고있을 보편적인 어린 시절 추억이다.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도 밥 먹을 때가 되면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자기 식구들과 밥을 먹는, 너무 당연해서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던 일과이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부터인가 식구들이 다같이 밥 먹는 평범한 일상이 ‘특별한 일’이 되고 있다. 한 지붕 밑에서 한 식구로 살면서도 시간을 맞추고 스케줄을 조정해야 겨우 같이 밥 먹는 시대가 되었다. 부모는 돈 버느라, 아이들은 이런저런 특별활동 하느라 모두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한 단체가 가족의 저녁식사 전통을 회복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해 올해로 6회를 맞았다.
지난 2001년 컬럼비아 대학 내 전국 약물남용 중독센터(CASA)는 매년 9월 네 번째 월요일을 ‘가정의 날(Family Day)’로 정하고 ‘자녀들과 함께 저녁 식사하기’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올해는 지난 월요일이 그 날로 캘리포니아에서는 마리아 슈라이버 주지사 부인이 앞장서서 홍보했고, 전국적으로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매년 적극 지지를 보내고 있다.
‘가족들의 저녁식사’가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대 초부터였다. 부부 맞벌이, 이혼 등으로 부모가 자녀들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현실이 청소년 문제를 증가시킨다는 보고들이 나오면서 제기되었다. 이후 ‘가족의 저녁식사 전통이 죽었다’‘일주일에 서너 번은 같이 식사하자’‘가족의 의식·전통을 만들자’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CASA의 ‘저녁식사’ 캠페인은 가족간 식사 빈도가 높을수록 청소년의 흡연, 음주, 약물남용 위험이 낮다는 연구결과에 기초했다. 구체적으로 매주 5번 이상 가족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청소년은 가족 식사 횟수가 2번 이하인 청소년에 비해 약물남용 위험이 70%나 낮다고 한다. 아울러 부모형제와 자주 식사하는 청소년은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훨씬 낫고, 학업 성적이나 SAT 성적도 더 우수하다는 일련의 연구결과들이 나와있다.
한마디로 자주 식사를 같이 하면 자녀가 심신이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며, 올바르게 잘 자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왜 이렇게 중요할까.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밥만 같이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한자리에 같이 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 집에 같이 산다고 우리가 가족들을 반드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춘기 자녀들은 밖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 마음 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힐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려면 얼굴을 마주 하는 일이 필수적인데 현 생활패턴으로는 그중 쉬운 기회가 저녁식사 시간이다.
아울러 밥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은 대화이다. 식구들이 그날 하루 지낸 일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자녀들이 식탁 매너는 물론 부모의 가치관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무리 딱딱한 회의라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밥을 같이 먹을수록 가까워지지 마련인데 가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자주 같이 먹고 어울리는 가족들일수록 그만큼 정이 더 끈끈한 법이다.
‘저녁식사’가 중요한 것은 가족간 연결고리를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부모는 존재의 닻이다. 부모라는 닻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아이들은 쉽게 비뚤어지지 않는다.
식구들과 더 잘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느라 식구들과 밥을 못 먹는 현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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