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간편한 차림으로 문을 나섰다. 산책을 하며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다. 어제 밤 문학캠프에서 돌아와 신문을 펼치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의 글 한 줄이 있었다. “나쁜 생각을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쳐라.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계속하라.”
참 좋은 말이다. 그래, 좋은 생각만 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무언가 발길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미끈했다. 손으로 집어보니 그것은 자카란다 꽃이었다. 자카란다. 봄에 피는 꽃, 봄이면 온 동네가 꽃 그늘에 덮일 정도로 만발하는 꽃이 바로 자카란다이다. 그 보랏빛 예쁜 봄꽃이 이 가을의 한 중심에 저 혼자 피었다가 떨어져 내 발길에 밟히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문학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간 맘모스 산은 해발 9,500피트로 한국의 백두산보다 높은 산이다. 거대하고 웅장했다. 일행을 유혹하려는 듯 눈발까지 날리고 있었다. ‘유월의 호수’(June Lake) 주변 길로 버스가 지나갈 때는 차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아기 병아리처럼 노오랗게 단풍이 든 은사시 나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두 나무가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리 지은 아름다움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더욱이 은사시 나무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몸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에 “사시나무 떨 듯 한다”는게 있는데 저런 모습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는 점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멀리 새하얗게 보이는 산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만년설이 쌓여서 저렇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눈이 아니라, 눈처럼 새하얀 색깔의 바위였다. 거대한 바위가 산등성이 전체를 부여안고 가슴을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연도 눈속임을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산의 잘못이 아니었다. 산은 스스로 눈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내 마음대로 바위를 눈으로 잘못 보고 오해한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내 방식대로 판단하고 인정해버리는 나쁜 버릇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광활하게 가슴을 드러내놓고 누워있는 사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름 모를 선인장이 보였다. 그것은 ‘점핑 촐라’란 이름의 선인장인데 무서운 독을 지닌 식물이라 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몸을 이용하여 이동을 하는데 바늘처럼 생긴 가시가 피부에 닿으면 살 속까지 파고들어 간단다. 잠시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사람도 이름에 따라 정해져 있는 성품이 있고, 이름만 보고도 그 사람의 모든 것, 숨겨진 부분까지를 짐작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이름에서 사람들은 어떤 정보를 얻게 될 것이며 어떤 느낌을 받게 될 것인지...생각만으로도 어질어질한 느낌이었다.
만약 그것이 그렇다며 나의 이름에서는 ‘자존심 건드리면 터지는 여자’ 라는 것이 첫 번째 정보일 것이다. 이번 문학 기행에서도 그만 티를 내고야 말았다. 회전을 하는 버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이 불안하다며 불평을 하는 한 아주머니에게 그만 화난 음성으로 대꾸를 해버렸다. 자존심을 다쳤다는 옹졸함으로... 자존심이란 자격지심의 또 다른 일면이라는데 그 순간만 참고 넘길 것을 하고 생각하면서 후회가 가슴을 치민다. 나 자신 은사시 나무처럼 파르르 떨었으리라. 은사시 나무의 떨림은 아름답지만 나의 떨림은 경망스러웠을 게다. 어질고 넉넉해야 할 나이에 참을 줄을 모르다니... 후회막급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기뻐하며 감탄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려면 마음을 어질고 지혜롭게 가졌어야 옳았다. 흰색의 바위가 눈이라고 착각했다가 바위라는 것을 알았지만 절망스럽지는 아니했다. 바위는 바위대로 자연스럽고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별 것 아닌 여자로 알고 지내다가 괜찮은 여자로 새롭게 인식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모르는 여자도 아름답다’(고은 시인은 ‘가을엔 편지를...’이란 노래에 그렇게 썼다)는 이 가을에 좋은 행동을 보이지 못한 것이 끝내 후회로 남아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손아귀에 쥐고있던 자카란다 꽃잎이 녹아있다. 아마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갔던가 보다. “아주머니 미안했어요, 사과하고 싶어요.”
홍민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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