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선한 능력으로’는 나치에 항거하다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기도문 같은 글에 곡을 부친 것이다. 이 시는 고난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놓지 않았던 고요한 평강, 절절한 소망, 하나님의 동행에 대한 확신을 읽게 한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39살에 처형된 본회퍼 목사를 이런 찬양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기쁨이다.
비폭력 민주화 운동에 사형까지 선고하던 70년대 중반의 한국. 극악한 탄압은 학생운동도 잠시 움츠러들게 했다. 모두가 숨 죽이던 이 때, 다시 저항의 촛불을 켜든 이는 기독 학생들이었다. 신앙이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한 항거가 가능했다. 이들의 공판정에 가는 것만으로도 불온시 되던 분위기에서 정권의 주구였던 검사, 비열한 판사 앞에서 청년들은 당당했다.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면, 오늘의 한국을 이끈 두 동력 중 하나인 ‘민주’는 앳된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빚진 바 크다.
50년 전 본회퍼 목사는 이런 한국 청년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독일의 실명 소설 ‘백장미(Die Weisse Rose)’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이름으로 소개됐다. 나치에 저항하다 참수된 뮌헨 대학생들의 이야기였다. 독일 교회는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고, 옹호에 앞섰다고 역사는 전한다. 당시 한국 교회 역시 극소수 깨어 있는 이들을 빼면 침묵하거나 독재의 편이었다. 이른바 대형교회의 목사를 비롯한 교계의 기성 권력은 호텔 조찬에 참석해 불의한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축복했다. ‘위의 권세에 복종’ 운운하며.
성경은 원하는 이 마다 가져다 쓸 수 있는 열린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을 끌어 들이지 않은 이단을 보았는가? 보수 복음주의는 트럼프를 고레스에 비유하며 지지한다. 오늘의 이란인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는 이방인이지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 갔던 유대인들을 귀환시킨 인물이다. 보수 기독교는 ‘모범 크리스천’과는 거리가 먼 트럼프에 고레스를 갖다 붙여 하나님이 쓰실 도구라고 한다.
한국의 탄핵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목사는 “계엄은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신 일”임을 강변한다. 19세기 초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던 영국의 목사 중에는 “노예 제도는 하나님이 승인한 제도”라고 주장한 이도 있다. 김정은 일가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고 있고, 그 체제도 하나님이 승인한 제도여서 용인돼야 하는가?
한국 개신교는 탄핵의 와중에서 점 조명을 받고 있다. 목사들이 ‘아스팔트 보수’를 이끌고 있다. 유례없던 일이다. 한 원로 목사는 “사악한 무리 완전히 청소하고, 종북의 귀신들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끊이지 않는 대통령 일가의 무속 논란에 대한 질타가 먼저였다. 개신교 전체의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교계의 대응은 뜻밖일 정도로 미적지근하다. 방법과 표현만 다를 뿐, 생각과 지향점은 같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들린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은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화해, 사랑, 용서, 통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계속되고 있다. 대신 그 자리에 증오, 파괴, 선동 등이 자리잡았다. 극우 목사들 간의 주도권 다툼도 가관이다. “목사라서 죄송합니다”(하창완 목사) “예수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지 말라”(이재철 목사)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목사님, 예수 믿으세요?” 한 탐사전문 기자는 목사라는 극우 선동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와 미주의 이민교회가 그리 멀지 않다. 서울 극우 집회의 연단에서 소개됐던 목사들이 부흥사라는 이름으로 남가주 한인교회 강단에 서곤 했다. 코로나 방역 지침을 무시한 목사가 무슨 순교적 신앙을 가진 것처럼 소개되기도 했다. 일행이 우르르 몰려왔던 한 LA 식당의 밥값을 여기 한인이 자발적으로 내기도 했다. 미주 교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목사도 아니다”와 “들어 보세요. 맞는 말이예요”로.
얼마 전 한국의 기독교 방송이 개신교와 관련한 설문조사 결과를 전했다. 비 개신교인에게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호감도를 물었다. 천주교와 불교의 호감도가 50% 안팎이었던 반면, 개신교와 그 종교인에 대한 호감은 13~14%. 원불교 보다 낮았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묻자 50% 이상의 개신교인이 ‘낮은 편’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1/7/2025 CBS 뉴스)
대다수 목사는 소리 없이 영혼 구원과 치유, 나눔 등의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정치 이념에 함몰된 일부의 파행을 개신 교단들이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혐의는 온당하지 않다. 어려운 시간이다. 이민 교회에게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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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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