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는 나와 가장 다른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났고, 또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평생 못잊을 시간들이었다. 마약 소지자와 딜러, 강도, 강간범, 사기범들을 만나, 그들에게 경범 혹은 중범재판을 받게 할 것인가, 아니면 무죄를 선고할 것인가를 결정했던 것이다.
한 사건만 다루는 일반 배심원과 달리 대배심원으로 소집되어 2주 동안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했다. 나이, 성별, 인종이 각양각색인 11명의 배심원들은 대검사가 진행한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우리의 의무와 역할, 마약과 그 관련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하루 평균 30여건을 다루었다.
심리는 대개 용의자없이 관련 경찰과 피해자의 증언으로만 진행되었다. 마약사건은 너무 많아 시간과 경비절감의 방법으로 법정에 상주하는 경찰이 담당 경찰의 증언서를 읽으며 진행됐다. 사건마다 증언이 끝나면 검사, 증인, 서기와 배심원 2명이 돌아가면서 법정을 나갔고, 남은 배심원 9명이 거수로 투표했다. 판결은 7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데 대개는 만장일치였다.
가끔 검사와 배심원이 같이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선 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하건만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취하할 수밖에 없는 경우였다. 마약 딜러가 확실한데 용의자가 옆의 커다란 코케인 봉지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겼을 때였다. 매매에 쓰이는 저울과 플래스틱 샌드위치 백이 현장에 없는데다 그가 그 봉지에 손댄 것을 본 증인도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취하시키면서 오히려 그 편이 더 정당하다는 확신이 들 때도 있었다. 강간당했다는 피해자의 태도와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오히려 일을 만든 것처럼 보여졌으며 증언도 경찰 조사와 맞지 않았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피해자 편을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이민자가 용의자일 경우, 나와 남미에서 왔다는 배심원은 유독 질문을 많이 던졌다. 정황상 문화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인 배심원들에게 설득작전을 펴기도 했다.
대개의 직장은 이 기간을 유급휴가로 인정해 준다. 그럼에도 우린 일당 19달러씩의 주급을 받았다.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 때문에 진통제를 복용했던 사람도, 법과대학 입학을 알아봐야겠다는 사람도, 어느새 친구가 된 우리는 2년 동안 다시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단히 섭섭해했다. 내 경험을 듣던 한 한인 친구가 소집장을 받고도 귀찮아서 영어를 못한다고 빠진 것을 은근히 후회했다. 죄를 판결하는 일인만큼 배심원은 반드시 영어를 이해해야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미국인과 별 부담없이 대화가 가능한 정도라면 충분할 듯 싶다.
심리가 대개 일반 법정용어와 일반 영어로 이루어지고 혹 이해 안되는 부분은 배심원 회의때 물어볼 수도 있다. 남미 배심원은 검사가 외국인 용의자를 ‘Alien’이라 하자 얼굴을 붉히면서 어째서 그를 ‘외계인’이라 부르냐고 따졌다. 당황한 검사가 ‘Alien’은 ‘외국인’을 의미하는 법적 용어라고 설명하자 그는 그런 줄 몰랐다며 활짝 웃었다.
미국인들은 영어가 완벽해서 사건을 정확히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잡념으로 증언의 일부를 놓쳐 투표 전에 재확인하는 미국인들도 의외로 많았다. 11명으로 구성된 이유엔 그런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탁아비용이 없던 한인 엄마가 어린 아들을 혼자 방에 가둬 둔 채 일하고 돌아와 아이의 주검을 발견했던 사건이 있었다. 검사는 ‘내가 죽였다’는 엄마의 울부짖음을 문자 그대로 믿고 그녀를 살인자 취급했다. 그때 만약 배심원 중 한인 아니 동양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그런 식으로 자책감을 표현하는 문화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면에서 배심원 의무는 미국인들보다 우리 이민자들에게 훨씬 더 큰 의무일 수도 있다.
15년 시민권자로서 투표 외 별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다가 이번 기회에 진짜 시민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는데, 감사장까지 받으니 감개가 무량할 지경이었다.
심리중 음료, 간식이 허용되어 도넛, 과자등을 나눠 먹었는데, 어떤 이는 꽉 막힌 방에 갇힌 스트레스 때문에 계속 무언가를 먹어댔다. 모두가 최소한 2~4파운드의 몸무게가 불어났음을 확인한 마지막 날, 우린 누구를 대상으로 이 사건을 고소할 것인가 하소연했다.
김보경
북 켄터키대학 강사
kimb@n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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