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생한 “잘 있어라~”
우영 오빠가 세상을 떠난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 49제다. 이제 슬픔의 늪에서 빠져 나오며 다시 오빠를 돌아본다. 내게는 오빠지만 사랑 받던 만화가이기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4~5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았던 오빠는 2년전 다시 간으로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해야 했다. 간단한 수술이라고는 했지만 수술실을 나온 오빠는 솜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어슬렁거리며 일어나 “작업해야지”하고는 근처 사무실로 나가버렸다.
그후 오빠는 새로 그리는 “십팔사략”의 자료 수집을 위해 중국으로, 일본으로 여행을 다녔다.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에 둘러싸여 왁자지껄하면서 가끔 전화를 걸어보면 여전히 “건강하다, 잘 있다” 그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빠의 활짝 웃는 얼굴이 신문이며 잡지에 실려왔다.
하지만 ‘암’이란 놈이 오빠의 몸속에 있다는 것은 도무지 불안하고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모두 장암과 위암으로 잃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 그 불안해하던 일이 올해 초 현실이 되어서 닥쳐왔다. “폐로 암이 번졌대요, 오빠가 돌아가시려나 봐.” 늘 씩씩하던 올케언니가 수화기 속에서 펑펑 울었다.
올 것이 왔구나, 부랴부랴 서울로 달려가니 오빠의 모습은 2년 전과는 달랐다. 방사선 치료 때문인지 성성하게 남은 머리칼은 허옇고 초췌해진 얼굴은 병색이 깊었다. 오빠는 암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괴롭다는 방사선 치료도 여러 차례나 받고 칼같이 약을 챙겨 먹으며 최선을 다했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병원에서 찍은 오빠의 뇌 사진에는 계란만큼이나 큰 암세포가 또 발견되었다. 의사는 가족을 불러놓고 “일주일 후가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니 준비들 하세요” 하는 기가 막히는 소리를 했다. 가족들은 포기할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눈치 빠른 오빠는 그 날부터 모든 치료약을 먹지 않았다.
초연한 자세로 처음엔 우울해 보였으나 곧 평온해졌다. 가족들 몰래 약을 쏟아버리고 병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갔다.
이미 뇌에 많은 손상을 입은 듯 가끔 딴소리를 했지만 줄 이은 문병객으로 집안은 매일 시끌벅적하였다. 행복해 보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조카들을 불러 일일이 손을 잡고 힘을 주면서 “잘 있어라아~” 웃어 주었다. 사실 오빠는 벌써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 여름 온 가족이 모이자 “내가 죽는 건 괜찮아 식구들이 걱정이지” 하며 가장의 무거운 마음을 읽게 했다. 아내에게는 살아갈 방도를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등 자상하고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오빠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쳤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를 환영 나온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 허공을 향해 팔을 들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자세로 숨을 멈췄는데 입가에 곱고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했다.
일산 병원에는 “고우영 화백, 편히 가소서” 눈이 시린 플랜카드가 걸리고 100개가 넘는 화환이 밀려들어 병원 건물에 매어 달아야 했으며 문상객과 취재진으로 병원은 거의 마비가 되고 친구들은 실신하여 응급실로 실려 가는 등 살아서 누린 인기만큼이나 법석을 떨었다. 어느 분이 선물했다는 값비싼 꽃동산 묘지로 가는 길엔 골목골목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서 애도하며 보내 주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전에 오빠가 누리던 인기나 명예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오빠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오누이로 자라면서 애지중지 아껴주던 기억들이 소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유명을 달리한 지금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사랑 앞에 위안과 함께 존경을 표한다. 그가 만들어 놓고 가는 선량한 삶의 자취가 더 없이 값지고 소중해서다.
감칠맛 나는 위트와 아찔한 터치로 우리 마음에 즐거움을 남겨주던 오빠는 평소 자기가 그리던 만화의 주인공처럼 애통함과 아쉬움을 남기며 갔다.
유비가, 관우가, 제갈량이 죽고 나자 삼국지가 재미없어진 것처럼 우영 오빠가 훌쩍 가버리자 그를 사랑하고 아꼈던 우리들은 살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뭐 그렇게 서둘러서 소풍가듯 떠났을까.
고은혜 업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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