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김새’란 말이 있다. ‘삭힌 것’ ‘삭힌 흔적’이란 뜻이다. 삭힌다는 것은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외로움, 분노와 같은 어두운 감정들을 스스로 누르고 안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술적으로는 가슴에 맺힌 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원형의 한, 쓰라림. 신산과 고초. 그러한 삶의 애처로움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피나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한을 한으로 풀면 폭력적인 자기 발현밖에 안될 것이다. 사랑하다 실연 당한 상처를 그대로 푼다면 사랑의 복수극, 그야말로 한편의 멜로 드라마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외부로의 발산만을 주장할 때 그것은 유치한 현상이 되고 만다.
이럴 때는 시김새로 가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실상 원초적인 한을 삭히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미학적으로도 그럴 것이며 윤리적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야만 인간은 제대로 성숙된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고 억울한 사연을 누르며 올바른 삶으로 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의 예술이나 인생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그늘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시김새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이렇게 많이 삭히고 삭히는 연습을 한 예술인은 남이 보아도 시김새가 은연 중에 드러나고 그늘도 있다.
한국 남도 지방에는 ‘귀명창’들이 많다고 한다. 귀명창이란 자기가 소리는 못하지만 남의 소리를 잘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있는 분들을 말한다. 나름대로 한을 삭히고 삭히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자처하는 소리꾼들이 나와서 소리를 한다고 하자. 허술하게 술 한잔 걸친 귀명창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나서 한 마디씩 한다.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저 사람은 시김새가 모자라는군” 이렇게 말하게 되면 그 소리 명창의 평가는 끝장이 나버린다고 한다.
시김새가 있는 사람의 소리에는 자유자재의 기교가 숨어있다고 한다. 소리 한 마디 허공에 턱, 던져놓고 딴 짓 한참 하다가 다시 툭, 잡아 이어서 불러도 그 소리에 조그마한 틈새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런 때 의미심장한 자기 표현의 기회가 된다. 그야말로 시김새가 넘쳐나는 순간이다.
그 시김새가 있을 때 그늘도 나타난다.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늘이란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모든 것들이 역설적으로 대립되면서 공존하는 이상한 영역이겠다. 또 그 사람의 현실과 환상, 자연과 초자연, 죽음과 삶, 나와 남,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창조능력의 그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때 그늘이라고 해서 완전한 어둠은 아니라고 본다. 그 어둠은 생각이 많은, 생각을 많이 거친, 곰삭음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또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그늘로 보이는 것, 시김새로 통하는 길이라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 가서 머무는 동안 후배들과 만나 동창회를 가진 적이 있다. 서울의 안국동에 있는 한국일보사 건물 13층 부페식당에서 열네명이 모인 자리였다. 누군가 옆에서 이름을 말해주어도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생소한 얼굴들이 많았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젊음이 고스란히 날아간 뒤이기도 해서 그랬던가 보다. 살이 많이 쪘다느니 미워졌다느니 각기 다른 느낌으로 재잘대는 후배들의 관심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후배들이 나에 대해 기억하는 것들 중 한 가지만은 완전일치가 되는 것이 있었다. “저 언니는 그 금쪽 같은 외출시간에도 책 한권 꼭 들고 잔디밭에 앉아서 뭔가 생각하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
우리는 그 시절 주중에는 전혀 외출이 안 되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주말에도 낮 시간에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기에 울타리 밖 세상은 궁금하고 그리운 곳이었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시간에 책이나 붙잡고 잔디밭에 혼자 앉아 청승을 떨었다니 지금은 많이 잊혀진 나 자신의 모습에 차라리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시김새의 세월은 얼마나 더 나를 스치고 지나가야 그늘이 무엇인지 알게 될지? 앞으로 더 생각해 보고 아파해 볼일이다.
홍민자/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