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지하 시인의 ‘생명문화’ 강연회가 LA에서 열렸다. 본래 김지하 시인은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의 대명사였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치하에서 ‘오적’(五賊) 시를 써서 짓눌린 민초들의 한을 풀어주느라 옥고를 수도 없이 치렀다. 감히 입을 뻥긋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느라 벙어리처럼 짓눌려 지냈던 암울한 1970~980년대 그는 억압받는 자들의 영웅이며 대변자였다.
이때 쓴 그의 시는 정말 통쾌했다.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가번쩍 으리으리 꽃 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차관, 장성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렸다’
그런 그가 얼마나 고문당하고 두들겨 맞았으면 그간 강산이 두 번이나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지팡이 집고 어정어정 걷는 품이 골병든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 내용은 더 이상 젊은 시절 한과 고집으로 응어리진 예전의 ‘김지하’가 아니었다. 이번 강연회 동안 그의 눈빛과 표정과 언어는 시종 담담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리하여 더 이상 저항시인의 모습이 아닌, 어찌 보면 도통한 도사나 성자 같은 그런 다른 차원의 모습이었다.
그의 존재와 삶은 분명 ‘한과 미움’의 응어리에서 풀려난 용서를 통한 ‘생명과 평화’에로의 ‘부활’이었다.
김지하 시인의 말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성향은 ‘한’과 ‘흥’이 어울린 ‘엇박’성향이란다. 1,000번 이상의 외적 침략을 당하면서 살아 남아온 한민족 성향이 ‘한’으로 똘똘 맺힌 응어리를 풀고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흥’의 문화라고 한다. 그 흥밋거리가 바로 지난 축구 4강 응원단의 ‘대~한민국’ 외침이란다.
엇박의 의미는 그래서 3박자의 혼돈과 2박자의 질서의 조화적 결합이라, 달리 말해 주역과 역주역의 변증법적 상호보완이라고 한다. 인생도 결국 ‘엇박’의 보완작용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삶과 죽음마저 그래서 별개의 독립적 의미가 아니라 보완적 결합인 ‘부활’로 이어져야 완성된다는 것이 김지하 시인의 믿음이며 사상이다. 이 안에서 피어난 꽃과 열매가 바로 그가 주장하고 있는 ‘생명문화’다.
두들겨 맞으며 한으로 골병든 그가 살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터득한 삶의 지혜가 저항을 뛰어넘은 용서요 사랑이며 생명이며 평화다. 그렇다보니 요즈음 그는 본의 아니게 배신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산다. 한풀이를 해주어야 할 그가 더 이상 저항그룹의 입노릇을 포기(?)한 때문일까. 이제 그는 더 이상 독설과 해학의 시를 쓰지 않는다. 대신 그는 생명의 외경, 생명의 신비, 생명의 고귀함을 외치고 다니는 ‘생명운동’의 전령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래서 김지하 시인은 본인이 결코 용기 없는 변절자가 아닌 ‘엇박’사상의 융합(Indentity Fusion) 을 내세우는 생명 평화운동가라고 주장한다. 그의 삶은 분명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싹이 틈을 의미한다.
우리도 삶 안에서 죽어야 살게됨을 체험한다. 부부간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도 그렇다. 자기가 이기기 위해 끝까지 자기 주장을 고집하다 보면 언쟁에는 이길지 모르나 결국은 지는 꼴이 된다. 차라리 져주면 오히려 이기는 꼴이 된다.
“내가 잘못했소. 그러니 용서하시오” 하면 오히려 상대방이 기고만장하는 대신 한풀 꺾여 “당신이 무슨 잘못-? 오히려 제 잘못인데요”하며 살갑게 웃게 되는 것이 부부지간이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동안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들이 가족과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한달 동안에 3건이 발생했다. 그들의 처지가 아니기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해야만 했던 그 기막힌 처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들이 만일 목숨을 끊기 전에 ‘자기 자신을 죽여야 살 수 있게 되는 진리’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다.
자아를 죽이는 일이 바로 용서의 길이며, 용서만이 화해이고, 화해하는 길만이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다. 이 진리의 길이 바로 하느님 아드님 예수가 보여주신 ‘부활’ 이 아닐까.
김재동 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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