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를 대학에 보내놓고 돌아온 날, 잠자리에 들기 전 습관처럼 아이 방문을 열었다. 대학에 가져갈 짐들을 챙긴다고 온 방을 들쑤셔놓고 떠나, 방 안에 어수선하게 남겨진 아이의 옷과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렇게 며칠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아이 방에 헝클어진 흔적이 그대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뚜렷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곤 했다.
오늘 집에 돌아와서야 루시아가 다녀간 것을 알았다. 격주로 우리 집에 와 구석구석을 치운 지 십 년이 넘었는데, 나는 종종 루시아가 오는 날이 어느 날인가 잊어먹곤 한다. 큰아이 방에 들어가 보니 온 방을 말끔히 치워놓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루시아는 침대 위치도 방 한쪽 끝에서 반대편인 방 입구 쪽으로 바꿔놓고 입구 옆에 위치한 욕실의 불도 환히 켜 놓은 채였다. 그제야 옷장 안이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밤마다 방 안을 들여다볼 때마다 어질러진 방바닥만 보고 욕실과 연결된 안쪽의 옷장 방까진 확인을 못 했었다.
큰아이가 자라는 내내 옷장 안에 옷을 산더미같이 쌓아놓으면 참다못해 내가 정리를 해 주곤 했었다. 정리해 줄 때마다 자기가 어지른 것을 스스로 치우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애를 제대로 못 키우는 게 아닌가 하다가도, 한편으론 내가 자랄 때를 돌아보며 나 자신의 업보를 치르는 것이려니 했었다. 내가 그 나이만 할 때 방을 치우라고 잔소리를 하시다 지쳐 결국 내 방을 치워주시곤 했던 친정엄마 생각을 하곤 했다. 옷으로 넘쳐나던 아이의 옷장 안이 덩그러니 남겨진 몇 벌의 옷과 빈 옷걸이들만으로 무척이나 허전해 보였다.
휑한 옷방 안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옷방 안에 있으니, 친정집 한 방 안에 놓인 내 옷장 생각이 났다.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첫 아이를 낳고 백일잔치를 치른 후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 후 한국에 방문하니 결혼할 때 샀던 장롱이 친정집 방에 놓여 있었다. 비좁은 방에 왜 필요도 없는 장을 가져다 놓았냐고 묻자 엄마는, “네가 남기고 간 짐을 네 시댁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가져가고 장은 가져다 놓을 때가 없다고 하고, 그렇다고 네가 시집갈 때 산 장을 버릴 수도 없고 해서 가져다 놨지. 장을 보면서 네 생각을 하곤 한다.”고 하셨었다. 내가 떠나온 지 18년이 넘었는데도 친정엄마는 아직도 그 장을 갖고 계신다.
합리적 이성을 내세우던 젊은 날엔, 비좁은 방에 쓸모도 없는 장을 세워놓고 먼지가 앉으면 닦아내곤 하시던 엄마의 노고를 비합리적이라 생각했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린 딸,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한 할머니가 떠올랐다. 버지니아에 온 지 얼마 안 돼 직장을 갖기 전에, 가족사를 쓰는 수업에 참석했었다. 강사도 연세가 많은 한 백인 할아버지셨고 나 외의 수강생 여섯 명도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매주 자신이 쓴 글을 나누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강사가 조언을 해 주셨는데, 한 주에 여든도 훨씬 넘은 백발의 할머니께서 글을 읽으며 우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십 대 때, 이유 없이 엄마를 싫어하고 대들곤 했었다. 고등학교 때, 하루는 노트 한 장에 “나는 엄마를 혐오한다”고 수백 번도 넘게 빽빽이 써서 엄마가 보라고 일부러 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학교에 갔었다. 그 날 학교에서 다녀왔을 때, 나는 책상 한가운데 놓인 종이를 보았다. 또 다른 종이 한 장에 엄마가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앞뒤로 빽빽이 써 놓은 것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그분은 흐느껴 우셨다. 울음을 삼키며 그분이 하셨던 말씀 - “엄마가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제대로 너무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너무 늦었다.”
그 수업이 2000년 가을 이맘쯤이었으니 어느덧 17년 전의 일이다. 가을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고 창밖엔 노란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앉아, 주름진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큰아이를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 애써 바삐 지내고 생각에 젖을 틈이 없이 하찮은 일에도 분주하게 움직였던 지난 며칠이 하릴없이 무너져내렸다. 창이 없어 빛이 들지 않는 옷장 방안에 앉아, 나는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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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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