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지(Kizhi) 섬에 있는 겨울성당. 못 하나 쓰지 않고 이렇게 기하학적인 건물을 짓다니…(왼쪽). Kirillo(키릴로) 마을의 호숫가에 있는 goristy성당. 운하 때문에 물에 잠겼다.
-민속촌 맨드로귀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동안 5번 배가 정박하여 내릴 때마다 각각 다른 맛의 러시아 문화와 문명을 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리버 크루즈 관광 안내 책을 사보니 몇 군데 볼만한 곳이 더 들어 있어 다 보지 못한 것이 있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배가 닿은 곳은 Mandrogui이었다. 이곳은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데 중요한 방문지인 Kizhi 라는 곳까지 거의 30시간을 가야 하므로 인위적으로 그 중간지점에 작은 섬을 민속촌 같은 것으로 지은 곳이었다.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보통 민속촌이면 쇠를 달구는 대장간 같은 당시 살림살이를 보여 주는 대신 그들의 인형 속 인형이 몇 개 들어가는 민속민예품을 만들고 파는 기념품 생산 현장을 재현하는 곳 같았다.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키지 섬
드디어 두 번째 섬 키지(Kizhi) 섬에 닿았다. 길이가 8킬로로 폭이 1.5킬로의 작은 섬이나 꽤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일 먼저 이 섬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핀란드, 러시아, 스웨덴의 켈트족들이 발틱 해를 건너 강을 따라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가는 첫 번째 길목으로 이 섬이 정류장 같은 역할을 한 듯하다. 어쩌면 한국도 고깃배가 떠날 때면 풍어를 비는 굿을 하듯이 만물에는 성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그들이 페가니즘(Paganism)이라고 할까, 굿 비슷한 일을 벌여 영어로 Land of gam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한 토속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1300년대에 Lazarus 수도사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동방정교의 성당을 지었고, 1558 년부터 시작된 스웨덴과 러시아 전쟁이 이곳에서 뺏고 빼앗기는 전쟁 끝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자 1714년 다시 못 하나 없이 성당을 지었고 그리고 캐서린 여제(1769-1774) 때 증축을 하여 오늘날에 모습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작은 섬이지만 부활절, 바울과 베드로 절, 예언자 엘리아 절 같은 축제는 이곳에서 열린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다.
고토보슬 강과 볼가 강이 만나는 곳 Yroslave(야로스라블)(위)과 성 엘리아 성당.
성당들이 꼭 양파 같은 지붕이 3개, 5개 등이 보통인데 이곳은 모두 22개가 있다. 많은 종교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동방정교에서도 왜 22개가 있는지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 성당은 수리중이라며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겨울 성당 안에 들어가 보니 강대상은 물론 벽, 천장까지 그림이 꽤나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 섬의 촌장 같은 사람의 집을 보면서 이 섬의19 세기의 생활을 보는 듯 했다. 러시아의 한 쪽의 과거를 보는 즐거움을 갖고 이 섬을 떠났다.
-키릴로(Kirillo) 마을과 수도원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크다는 white Lake에 호숫가에 있는 Goritsy 승천성당 수녀원은 허물어 저 있다. 그러나 인구 8천명이 조금 넘는 Kirillo 마을에서 8킬로 떨어진 호수 제방에 세워진Kirillo-Belozerk 수도원은 장엄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 수도원은 14 세기경에 수도사 성 시릴(St.Cyril) 이 모스크바에서 성모 마리아의 출현을 보았고 그리고 성모 마리아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 수도원을 지어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수도원 자체로도 러시아 황실에 적극적인 지원도 받았고, 또 지리적으로 모스크바 방어에 군사적 가치도 있어 18세기경에는 400개의 농장에 2만명의 농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러시아 혁명당시 이 수도원이 백군 편을 들었고, 그래서 공산화 후 쇠락을 걷다가 이제는 박물관으로 전락했다. 덕분에 많은 유물 특히 미술적인 가치가 큰 성당 내부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Yaroslval(야로스라블)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와 모스크바로부터 약 155마일 떨어진 곳에 강 코토로슬(Kotorosl)이 있다. 이 강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뱃길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강이 러시아 교통의 동맥으로 동로마 제국까지 가는 볼가 강과 합류하는 곳이 바로 야로스라불이다. 그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16 세기경부터는 영국이 이곳을 물품창고 본부로 썼고, 이어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까지 몰려들어 국제 무역항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도 가죽, 어류, 마직물, 그리고 목 공예품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공업도시로 특히 조선소와 무기 제조공장들이 들어선 공업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핵심 공업의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시 가운데에 레닌 동상이 아직도 서 있고, 전기버스가 다니며, 음식점과 상가에서 활력을 느낀다. 이곳에서 보드카 두병을 샀는데 면세점보다 싼 것 같다. 물론 나는 성 니콜라스 성당에 들어가 그 화려한 내부조각과 명화 같은 그림도 감상하는 등 몇 곳의 성당을 구경도 했고, 그리고 전몰 기념탑 뒤를 거닐어서 코토로슬 강과 볼가 강이 합류하는 곳까지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곰 조형의 정원을 보았다. 이곳 역시 곰 숭배 토착 신앙이 있는 모양이다. 곰은 전 세계에서 살고 있고 또 한국만이 아니라 독일의 베를린부터 세계 곳곳에 곰 숭배 토탬 신앙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민속 토템 목공예(위)와 인형 작업실(왼쪽). 드미트리 왕자의 관으로 믿어지고 있다(위). 드미트리 왕자의 죽음을 알리던 종(가운데). 드미트리 왕자 동상에서의 필자.
꽤나 많은 시간을 돌아 다녔고 그리고 배로 돌아기 전에 개인 미술박물관이 있어 들렀는데 별로 특징적인 것은 없었으나 그 개인 미술 박물관 주인공들 자기들의 초상화들을 전시했는데 황제, 여제 같은 사진이나 그림과 달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민간인의 옷 그리고 당시에 미녀라는 기준의 통통한 몸매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큰 홀에서 음악과 춤으로 우리를 대접하여 주었는데 누가 무슨 돈으로 우리를 즐겁게 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즐겼다. 왜 내가 누구 돈으로 서비스를 해 주느냐 이런 것까지 생각하는지 참 나는 아무래도 이상한( ) 놈인가 스스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참! 빼먹은 것이 있다. 동방정교 그리고 로마 가톨릭 두 종교의 싸움인지, 드미트리 왕자를 등에 업고 왕권 다툼인지 모호하지만 폴란드가 러시아 차르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1610-1613) 그때에 이곳을 폴란드가 점령했었다.
-우구리치(Uglich)
볼가 강가에 있는 이 마을은 937 년에 역사에 나타났지만 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이반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표도르 1 세가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왕위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표도르의 막내 동생 드미트리가 8세 때에 이곳 수도원으로 쫓겨 오면서 이 마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표도르 1세, 드미트리 왕자의 아버지인 이반 4세는 영어로 Ivan the terrible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뇌제 라고 불렀다) 이라고 불리며 무서운 폭군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는 경제를 살리고, 오늘날의 광활한 러시아 영토는 그가 정복으로 얻은 땅이다. 다만 부인의 독살로 여겨지는 사건으로 시작되어 그의 차르 후기에 정권 다툼과 왕권 승계에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이에 대처함에 있어 철저한 피의 처벌과 보복을 자행했으므로 그를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드미트리 왕자의 역사적 사건은 그가 10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시작은 수도원에 비상종이 울림으로 시작된다. 드미트리 왕자가 목에 칼로 찔려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검사장 보리스 구드노프는 왕자가 칼을 가지고 놀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그가 검사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이 돌발 사건의 여러 괴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드미트리 왕자가 시베리아로 망명을 했다고 했고 그 이후에 내가 드미트리 왕자라고 자처한 사람이 24명이나 나왔다한다. 그리고 한 명은 군을 조직해서 차르 자리다툼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또 한명은 폴란드를 등에 없고 망명 왕 노릇도 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미스테리, 판타지, 복수, 의적 등의 소설, 드라마의 가장 많은 소재가 바로 이 드미트리 왕자 이야기라 한다.
이 섬 마을은 바로 드미트리에 얽힌 성당 이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가 배에서 내려 성당 가는 길에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주 기다란 노점상 거리가 있었다. 값이 꽤나 싸서 우리 부부도 몇 가지를 샀다. 하지만 고백 하건데 이런 상품들은 사고 나서 집에 가져오면 항상 내가 왜 샀지 후회해 왔다. 하지만 여행을 나서면 무엇이라도 하나 사야하는 것이 병이라 스스로 나의 심리를 진단하면서 또 이곳에서 몇 개 샀다는 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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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문인,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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