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 419 주기를 맞이하는 날이다. 이내원 이순신 미주교육본부 이사장의 특별기고문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 관음포 해전의 당시 상황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사로병진책 수립>
임진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은 조선과 명나라가 야심차게 수립한 일본군 몰아내기 총공세라고 할 수 있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수군에 연패하여 결국 군수품 보급노선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 군부는 전면 남하하여 남해안을 따라 장기 주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조-명 지휘부에서는 네갈래 길로 3개 처의 일본군 본거지를 일제히 공격하여 몰아냄으로써 지루한 임진왜란을 끝장내고자 총공세 작전인 사로병진책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동로(東路)군인 마귀와 김응서는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고, 중로(中路)군인 동일원과 정기룡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를, 가장 서쪽인 순천 신성리 왜교성에 진치고 있는 고니시 유끼나가는 육상에서는 유정과 권율이, 해상에서는 진린과 이순신이 동시에 수륙양면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싸한 작전계획과는 달리 소극적인 명나라 장수들의 태도로 인해 동로군과 중로군이 연달아 패하여 퇴각하자 가뜩이나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던 서로군의 유정은 고니시 유끼나가 공격을 포기하고 남원으로 후퇴함으로써 육상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일하게 수로군만은 이순신의 단호한 결전의지에 진린이 감화되어 10월 2일부터 연합으로 광양만의 묘도와 장도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왜교성을 공격하며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지 않아 고시니는 고립무원의 난처한 입장으로 속을 태우게 된다.
<도요토미의 죽음과 철군>
이보다 약 두달전인 8월 8일(양력 9월9일)에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자 5대로(五大老)들은 도요토미의 죽음은 비밀에 붙인 채 조선 출정 일본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 갈 수 없듯이 10월 들어서서는 조선의 일본군부에도 도요토미 사망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여 일본 장수들은 어떻게 하던지 빨리 귀국하여 그 비상시국에서 각자 자기의 안위를 위한 처신이 급하게 되었으니 고니시는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속이 탄 고니시는 육군의 유정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각을 보장 받았으나 바닷길의 진린과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뇌물을 받아 먹은 진린도 스스로 물러가겠다는 적을 목숨 걸고 막을 필요없이 길을 열어 주자고 이순신을 설득하였으나 편범불반(片帆不返) 한 놈도 살려 보낼수 없다는 단호한 반대에 부딪힌다. 자존심이 상한 진린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장검을 들먹이며 이순신을 겁박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이순신의 군인다움에 감화되어 이순신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러나 곧이어 명나라 수군의 느슨한 봉쇄로 사천의 시마즈 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고니시의 통신선이 빠져나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 낸 이순신은 대규모 일본 구원군이 오는데 따른 작전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도면 1, 2 , 3(위부터).
<조-명 연합 수군의 작전>
<도면1>과 같이 장도와 송도를 거점으로 왜교의 고니시를 봉쇄했던 조명연합 수군은 봉쇄를 풀고 점선과 같이 일본 구원군의 진입해로가 될 노량해협으로 급히 이동하게 된다. 이 때가 1598년 동짓달 19일(양력 12월 16일) 한밤중이었다. 노량의 북쪽인 곤양의 죽도에서 대기하던 명나라 수군과 남쪽 관음포 북쪽에서 대기하던 조선 수군이 노량(현 남해대교 지점)을 빠져나오는 약 300척의 일본군 대 선단에게 때마침 불어 오는 북서풍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쏘아 촛불로 표시 된 지점에서 맹렬한 화공을 시작한 때가 새벽 2시 한밤중이었다.
이 두 차례의 기습으로 일본군은 약 200 척의 군선을 잃고 남해도 해안을 따라 살 길을 찾아 도망치기 바쁜 신세가 된다.
그러나 관음포 어구에 이르러 조선의 지리에 어둡고 어스름 미명에 시야도 분명치 않았던 일본군은 <도면2>의 화살표 맞은편 육지가 수평선에 닿을 듯 낮아 부산 방향으로 가는 열린 해로로 착각하고 관음포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기상천외의 돌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의외의 상황에 급히 추격해 오던 이순신 수군이 ‘오오라 이놈들 잘 걸렸다. 이제는 정말로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며 관음포 어구를 틀어 막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관음포의 백병전>
한편 살 길로 알고 관음포 안으로 깊히 들어 간 일본 수군은 곧이어 그 곳이 <도면3> 점선 부분과 같이 퇴로가 막힌 호리병 모양의 포구임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독 안에 든 쥐는 고양이에게도 덤빈다는 격으로 일본군 지휘부는 군사를 되돌려 결사 백병전으로 입구를 봉쇄한 조선 수군을 돌파해 나오기로 결의하면서 임진 7년 해전 중 가장 치열한 근접 백병 혼전이 전개된다. 이 돌발 상황으로 상승무패의 이순신 표준전법이라고 할 ‘조총의 사정권 밖 원거리 포격전’을 할 수 없게 된 이순신 대장선은 날이 밝으며 시야를 확보한 일본군의 집중 조총 사격의 표적이 되어 나라는 구했으되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하지 못하고 장렬한 전사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기록이 말해 주듯이 노량 관음포 해전은 위기 일발 적군에 둘러 싸인 이순신 대장선과 진린의 지휘선이 서로 교대로 구해줘야 할 만큼 급박한 근접 혼전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 인명피해도 조선 수군의 통제사 이순신을 포함,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의 지휘관과 명나라 수군의 부장 등자룡, 중군 도명제가 전사할 만큼 임진왜란 해전 중 가장 치열한 해전이 되었던 것이다.
<자살·은둔설은 허구>
<도면 3>과 같은 이순신 순국해역의 지형조사는 2005년도 해군 충무공 수련원 제장명 교수와 남해도가 공동으로 간척 이전 임란 당시의 관음포 해안을 점선과 같이 비정하므로서 이순신 전사의 필연성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논거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선비 문사들의 고전적 심정적 이순신 자살론이나 은둔설은 노량해전의 지리환경적 돌발 실상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허구에서 비롯되었음이 명백해 졌다.
정조대왕의 정사인 <충무공 이순신 전서>나 오늘날의 해군사관학교,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등 정통 이순신 주류학계의 이순신 전사 학설에 더 이상의 왜곡이나 변조가 없기를 바란다. 덧붙여 밝힐 것은, 이처럼 사활을 건 일대 격전으로 동편에 불꽃이 충천하는 것을 본 약삭 빠른 고니시는 지체없이 <도면1> 묘도 남쪽 수로를 따라 안전 철군을 완수했다.
이로써 노량해전의 최대 수혜자는 엉뚱하게도 가장 궁지에 몰려있던 고니시인 셈이니 새옹지마라는 반전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도 어김이 없는 듯 하다.
<사진자료: 해군사관학교>
<
이내원 이순신 미주교육 본부 이사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