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가는 길4 (Camino de Santiago)
▶ Day 15 ~ Day 21(비야칼싸르~레이곤 데 암브로스)지금까지 총거리: 355마일(581km)
아침에는 롱다리. 점심엔 숏다리. ㅎㅎ 감사하게도 하루종일 해가 뒤에 있었던 어느 날(왼쪽). 11마일을 걷고 멀리 보이는 동네(오른쪽 아래).
◇Day 15 (비야칼사르 ~ 엘 부르고 레네로)
-그믐달과 이상주의자
내게 주어진 한 평의 공간에서 깊은 단잠이 주는 심신의 회복, 매일 아침 기적을 경험한다. 새벽길을 나서니 여명의 붉은 동쪽하늘에 손톱 같은 그믐달(참고로 보름이 지나고 새벽 동쪽하늘에 뜨는 왼쪽이 휜 하현달; 해질녘 서쪽하늘에 걸리는 초승달과 반대 모양)을 보려고 잠시 뒤돌아 걸었다. 일출 후 사라질 그림 같은 풍경을 위한 잠깐의 불편함 쯤이야.
화씨 40도의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이 잔뜩 움츠려든다. 계속되는 들판을 걸으니 홍순관의 <늘 푸른>이 생각난다. ‘늘 푸른 세상을 꿈꾼다’며 결식아동 기금마련을 위해 만든 노래다. 절친이 ‘모니카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란다. ‘그렇지. 난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 사람 냄새나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며 몽상가 맞지. 그렇다면 ‘그런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몸짓은 뭘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김치찌개가 그리워
처음 만난 성당에 들어서니 은은히 울리는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잠시 후 천상의 소리 같은 성가가 울려 퍼져 뒤를 돌아보니 네 분의 수녀님이 라이브 성가를 부르신다. 4명의 주민과 3명의 순례자. 무릎 끓고 머리를 조아린 그들의 간절한 기도 앞에 누가 교리니, 교파니, 이단이니 등의 판단과 정죄를 할 수 있을까? 간절함과 진심이 담긴 모든 기도는 소중하다.
오늘은 동네 사이가 11마일인 광야를 걸었다. 두 마을 사이에 정말 아무것도 없다. 식당도, 가게도, 집도, 물도… 그저 들판과 나무와 길뿐. 토요일 아침이라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아 물병에 물을 채운 후 어제 산 견과류와 사과와 아침에 남은 바게트 빵으로 짬짬이 배를 채우며 4시간을 걸었다. 처음으로 한국음식이 많이 그리운 하루였다.
‘아! 매운 떡볶이. 김치찌개. 타이 드렁큰 누들. 찌라시. 된장찌개. 너무 먹고 싶다. 땡볕에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란 맘이 처음 든 날. 역시 배고픔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마음이여! 멀리 마을의 빨간 지붕이 보이자 난 뒤를 돌아서 지친 순례자들에게 외쳤다. ‘저기 멀리 동네가 보여요. 좀만 더 힘내요!”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4명의 순례자 가족.
◇Day 16~17 (엘 부르고 레네로~ 아르차우에야)
-풍경과 설렘
오늘도 광야 같은 11마일을 걸어야 되는데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점심도 든든히 먹고 마켓에 들려 간식과 과일도 샀다. 오늘은 유럽에서 산 핸드폰 데이터가 거의 없어 아무 것도 못 듣고 오로지 걷기에 집중했다. 500-600m 높은 지대에 며칠 동안 바람이 많이 분다. 바람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니 바람의 강약과 장단, 고조와 음조가 섬세히 들린다. 참 신기한 경험이다.
지난 일주일은 하루 종일 거의 혼자 걸었다. 다른 길꾼들과 식사 중에 짧은 대화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을 뿐 늘 혼자였다. 지인이 ‘외롭고 힘들지만’이란 문자를 보내왔는데 돌아보니 여기 와서 한 번도 외롭거나 심심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매일 올린 글과 사진을 통한 페북 친구들과의 소통, 그리고 매일 나와 동행하는 하늘과 나무와 구름과 들꽃 때문이리라.
자연 속에 있을 때 전혀 심심하지 않고 오히려 궁금즘과 호기심이 커진다. ‘뭐가 그렇게 다 신기해? 난 그런 네가 더 신기하다’라고 말하던 친구 말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내일은 다리품 팔아 어떤 풍경을 만날까? 피곤한 몸에도 설렘이 밀려드니 내가 신기한 족속은 맞나보다.
-조지아에서 온 할아버지
지난밤 10시쯤 이층 침대에 누우니 꿀렁거리는 매트리스와 코 고는 소리에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깨보니 새벽 5시. 이미 일어나 준비하는 순례자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찍 깨서 6시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밖은 칠흑처럼 어두워서 한동안 핸드폰을 켜고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빛이 따라오는 걸 보니 맘이 놓인다. 이곳에 와서 여러 몫을 감당하는 전화기가 없었다면 배낭이 더 무거웠을 테니…. 전등. 사진기. 사전. 일기장. 지도에 GPS까지, 참 감사한 세상이다.
순례길 중 우연히 길에서 4번이나 만난 스프링필드 고등학교 출신 자매들. 바로 이게 카미노의 묘미다.
추위에 떨며 걷다보니 조금씩 어둠이 걷힌다. 몸도 녹일 겸 커피 마시러 들어가니 미국 영어 액센트가 들린다. 조지아 주에서 온 72세 백인 할아버지. 반가운 마음에 3시간을 함께 걸으며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72세 잭(Jack)은 은퇴 후 아내와 10살 손주와 함께 사는데 손주의 사춘기 시작 전에 꿈꾸던 카미노를 걷는단다. 매일 손자에게 엽서를 보내는 할아버지의 사랑과 정성이 멋지다. 오늘도 큰 찻길가를 지루하게 걸을 뻔했는데 잭 덕분에 시간이 금방 흘렀다. 시간은 얼마나 주관적인가? 살면서 말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삶이 축복임을 새삼 깨닫는다.
점심을 먹고 쉬다가 18lb. 배낭을 다시 메니 천금만금처럼 무겁다. 내가 아침에 메고 온 배낭 맞나? 30년을 짊어지고 온 삶의 배낭이 버거워 여기로 피신 왔는데, 내가 짊어져야할 짐은 어딜 가도 피할 수가 없나보다. 거기다가 마른 풀과 들꽃도 거의 없는 큰 찻길 옆을 종일 걸으며, 왜 사람들이 이 구간을 차타고 건너뛰는지 이해되는, 진짜 지루하고 위험한 카미노의 하루였다.
◇Day 18~19 (아르차우에하 ~ 레온(Leon) ~ 산티바네스)
-차 냄새에 멀미가
오늘은 1세기경 로마인들이 만든, 카미노 중 제일 큰 도시인 레온을 지난다. 풍성한 재료로 스페인 최고의 식도락을 전해주는 레온에는 식당과 가게, 대성당과 가우디 빌딩 등 구경할 게 많아 많은 순례자들이 1-2일 묵지만, 난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큰 배낭 메고 순례자 티를 팍팍 내면서 관광을 했다. 어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까지 200마일 남은 레온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다음날도 19마일 중 1-2마일 빼고는 계속 큰 찻길 옆을 걸었다. 오후에는 차 냄새에 멀미가 나고 귀는 달리는 차 소리로 먹먹하다. 아침엔 복잡한 도로를 건널 때마다 몇 번씩 놀랬다. 그러나 그것도 한나절이 지나니 금방 적응이 된다. 하긴 반세기를 그 속에서 살았으니.
지금은 꿈꾸듯 살고 있지만 결국 내가 돌아갈 현실은, 오늘 걸은 길처럼 달리는 자동차의 분주함과 때론 커다란 트럭이 내뿜는 소음과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걷는 곳이다. 매일의 삶이 꽃길과 숲길이 아님을 알기에 어떤 길을 걷든지 -찻길이든 진흙길이든 빗속이든 땡볕이든- 바꿀 수 없는 환경을 불평하고 원망하는 대신, 우비나 우산, 모자와 장화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며 사는 일, 내가 평생 씨름해야할 숙제다.
카미노의 제일 높은 곳(1505km) 위에 세워진 철 십자가. 의외로 작고 소박하고 단순해서 좋다. 낮 2시. 아무도 없어서 배낭이 나 대신 십자가 앞에서 인증샷(왼쪽). 창문 크기가 모두 다른 Leon의 오디토리엄.
- 매일 보물찾기 하는 느낌
카미노 첫 주는 꿈꾸던 길에 선다는 흥분과 세계인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걸었고, 둘째 주는 무릎과 발, 어깨와 허리 등 온몸의 통증과 누적된 피로로 많은 에너지가 몸에 집중되었다. 이제 셋째 주가 되니 몸도 8-9시간씩 걷는데 적응되고 주변 풍경도 볼 것 없는 황량하고 정신없는 찻길 옆을 걷다보니 이제는 생각과 관심이 내면으로 옮겨지며 마음의 우물 깊은 곳에 두레박이 내려진다. 뭔가 잔뜩 가라앉은 물컵 바닥을 휘저으면 모두 물 위로 떠올라 정체가 드러나듯,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 여러 사건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매일 보물찾기를 하는 느낌이다. 눈은 자연 속 보물을, 마음은 묻어둔 의식의 보물들을….
◇Day 20~21
(산티바네스 ~ 레이곤 데 암브로스)
-음식은 무엇을 먹었나
오늘은 수면과 식사조절을 잘못해 어제 예약한 알베르게까지 못가고 4시쯤 인구 50명의 작은 시골마을에 멈췄다. 새벽 4:30에 깨서 못 잔데다가 아침을 커피와 빵 하나 먹고 8마일을 걸어 11시쯤 큰 도시(아스트로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니 식당이 문을 안 열었다. 할 수 없이 어제 저녁에 남은 오믈렛과 빵과 사과를 먹고 가우디가 지은 건물을 보고 나오니 완전 기진맥진. 벤치에 가방을 베고 누웠는데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나보다. 깨보니 1시 반. 도저히 다시 걸을 기운이 없었다.
스페인 와서 제일 힘든 게 식사 시간이다. 나는 평소 아침을 든든히 먹는데 커피와 크로와상이나 바게트가 전부인 이곳 아침식사에 늘 배가 고프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톨티야(감자 계란찜)를 거의 매일 먹으니 이제 그것도 물린다. 과일과 간식을 사서 걸으며 짬짬이 요기를 하지만 배낭 무게 때문에 많이 살 수 없고. 11시쯤 배가 고파 점심이라도 든든히 먹으려니 스페인 점심시간은 2시, 저녁은 보통 7:30-8시(그것도 순례자를 위한 배려. 현지인은 9시)에 먹는다. 그러니 오전 11시쯤, 다시 빵과 과일 등의 간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한국 산과 닮은 산정에서
낮잠에서 깨니 그늘 아래 서늘한 바람 탓인지, 어제 빤 옷이 덜 말라 적은 옷을 입고 걸은 탓인지 감기 기운에 몸이 으스스 떨린다. 다시 커피와 초콜릿, 귤과 쿠키를 사서 5마일을 더 걷다가 4시쯤 되니 배가 고프고 기력이 없어 해물 파에야를 허겁지겁 먹고 나니 완전 늘어져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은 총 구간 중 가장 높은 산을 넘기에 오늘 산 중턱까지 오르려 했는데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 마음이 속상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생이란 게 어차피 내 계획과 뜻대로 안 되는 게 더 많으니 속상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일찍 씻고 6시부터 누워 뒹굴거리며 여러 책과 글을 읽으니 몸과 마음에 쉼이 녹아난다. 내일 높은 산을 오를 준비로 오늘은 챙겨온 수면제를 먹고 일찍 꿈나라로.
다음날 6시쯤 깼으니 9시간을 시체처럼 잤다. 숙면이 얼마나 감사한지, 500m 고도를 올라가는 강행군에도 지칠 줄 모르고 20마일을 걸었다. 까미노 총 500마일 구간 중 1,505m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올라야하는데 어제 컨디션이 안 좋아 걱정했으나 이미 1,000m의 고지대에서 시작해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춥지 않고 날씨도 좋아 오랜만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한국 산과 닮은 겹겹의 산봉우리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131마일 남은 순례길
오늘로 카미노에 오른 지 21일. 습관을 바꾸는데 최소 21일이 걸린단다. Maltz 박사는 ‘생각이 의심, 고정관념을 담당하는 대뇌피질과 두려움, 불안을 담당하는 대뇌 변연계를 거쳐 습관을 관장하는 뇌간까지 가는데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이 21일’이란다. 이제 나도 매일 짐을 싸고 풀고 낯선 숙소에서 낯선 이들과 잠을 자고 8-9시간을 걷다가 6-7시쯤 숙소에 도착, 씻고 저녁 먹으며 오늘 걸은 길과 내일 걸을 길을 공부하고, 8시쯤 페북에 글 쓰고 10시쯤 침대에 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이제 총 구간(500mile/800km)의 3/4을 마쳤고 산티아고까지 131마일(209km)이 남았다. 지금처럼 하루에 18-20마일을 걸으면 일주일 후에 마칠 수 있겠지. 문득 순례 전날 생잔에서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낯선 사람들과 한 방에서 자던 알베르게의 첫날밤이 떠오른다. 그 동안 여러 고생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사고나 아프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감사한 밤이다.
<
글, 사진/ 모니카 이(페어팩스,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