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더욱 생각나고 보고픈 사람이 있다. 어린시절 많은 추억의 보따리를 선물해주었고, 어른이 된 후에는 나의 베프 (best friend)가 되어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의 이모다. 친정 엄마의 유일한 자매였던 이모는 5살 아래 동생을 30년 전에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몇 년 동안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며 조카인 나와 동생들을 친자식 이상의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 인천에 정착한 후, 장녀인 이모는 가게를 하셨던 외할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맡아야했고, 서울로 유학온 사촌들의 도시락을 열몇개씩 싸셨다. 공부 욕심 많았던 친정엄마가 교복 입은걸 보고, 가끔 심통부리며 울면 외할머니가 미안해서 새옷을 사주곤 하셨단다. 영화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밤에 몰래 영화구경을 갔다오면 친정 엄마가 문을 열어 주곤 했는데, 하루는 불러도 답이 없어 담을 넘다가 외할아버지 한테 들켜 둘다 매를 맞았다며 웃으신다. 여전히 뮤지컬과 영화, 음악을 좋아하셔서 한국에 가면 같이 뮤지컬을 보고, 종로의 실버극장에 가서 흑백영화를 함께 즐긴다.
목소리가 곱고 노래도 잘하는 이모랑 차로 달릴 때면 종종 창문을 모두 열고 음악을 크게 틀고 같이 따라 부르며 달리곤 한다. 십여년 전 한국일보에 버지니아 비치의 체사픽 다리가 소개된 글을 읽고 ‘야! 바다에 떠있는 듯한 다리를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하셨다. 다음날 나는 바로 왕복 500마일 운전을 마다않고 내려갔다. 바다 위에 오솔길처럼 얹혀있는 왕복 40마일의 다리를 이모가 좋아하는 나훈아 노래를 크게 틀고 창문을 열고 신나게 달렸다. 하늘을 날듯 행복해하던 칠순 이모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사촌들 예닐곱과 어울려 인천 이모네 집에 모여들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이모는 늘 반갑게 맞이해주셨고 보통 한 두달을 죽치고 지냈다. 간식을 해줄 때면 우리는 장난기가 발동해 ‘주모! 여기 빈대떡과 떡볶이 육인분’이라고 외치면 ‘네! 여기 대령입니다요’하며 장단을 맞춰주셨다. 반죽한 밀가루를 밀대로 얇게 밀어 손칼국수를 해주셨고, 주전자 뚜껑을 눌러 만든 만두피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만두도 빚어주셨다. 밤에는 마루에 큰 모기장을 치고 그 속에 쭈루룩 누운 조카들에게 6.25때 피난 시절, 엄마와 삼촌들이 일본에서 살던 어린시절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 주곤 하셨다.
여름에는 김밥을 싸고 튜브와 돗자리를 들고 졸망졸망한 조카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꿰어 버스를 두세번 갈아타고 인천 송도 해수욕장에 데리고 갔다. 신나게 놀다 보면 이모는 밀짚모자를 쓰고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모자가 안 보일만큼 멀리 가셨다가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나곤 하셨다. 젊을 때 한강을 건너기도 하셨던 이모는 지금도 일주일에 3일은 수영을 가서 20바퀴를 돌고 오신다고 하니 70년 수영인생의 끈기가 존경할만하다.
가방끈은 짧지만 이모는 지혜와 재치가 넘치신다. 마음이 힘들 때 이모랑 통화를 하면 항상 힘이 난다. 연년생을 키우며 이모에게 힘들다고 넋두리하니 ‘애들이 예쁘냐?’라고 물으셨다. ‘그럼, 너무 예쁘지’라고 답하니 ‘세상에 공짜가 없어. 어떻게 힘들지 않고 그냥 예쁘기만 하니?’라고 하셨다. 성당을 다니지만 기도를 못한다며 그냥 매일 ‘주님, 감사합니다’라고만 하신단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이모는 어느 날 ‘주님, 감사합니다. 근데 돈만 쪼끔 더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 하니 ‘그럼, 건강이나 자식들 좀 힘들고 돈 있는건 어때’라는 음성이 마음에서 들려와 ‘에고… 아니예요. 저 그냥 돈 없어도 되요. 그냥 지금이 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한참을 웃었다.
2-3년에 한번씩 뵐 때마다 조금씩 기력을 잃어가는 이모를 뵙는 마음이 짠하고 가슴 아프다. 나중에 이모의 세례명이 ‘모니카’인걸 알고 스스로 참 뿌듯했었다. 얼마 전에 버지니아 비치의 다리를 갔다 온 후 당신의 젊은 시절을 조카들에게 넉넉히 내어준 이모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운 느낌은 축복이다’라는 박완서의 글처럼 이모는 내 삶의 큰 축복이었음을, 돌아가시기 전에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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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이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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