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순이.”
어릴적 엄마가 종종 부르던 나의 별명이다.
식빵에 버터를(예전엔 아마도 마아가린이었을 것이다)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설탕가루를 듬뿍 뿌려 자칭 “빠다빵” 을 만들어 남동생과 둘이서 식빵 한 줄을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빵과 버터를 너무 좋아하니까 엄마가 너희는 미국 가서 살아야겠다 라는 말을 종종 하셨는데 말이 씨가 되어서 그런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빵은 물론 수제비, 비빔국수, 김치부침개 등등 밀가루가 들어가는 음식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먹곤 하던 빵순이가 드디어 미국내 최고 밀생산지인 팔루스(Palouse)에 다녀왔다.
사실 내가 사는 곳은 버지니아 비치이기 때문에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새벽 7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새벽 한시에 집에서 출발 네시반에 공항 도착하여 파킹하고 짐 부치고 비행기 체크인하기까지 4시간30분을 소요하고 힘들게 비행기에 올랐다.
밤잠을 설친 터라 기내에서 꿀잠을 자고 워싱턴주 Spokane International Airport 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공항이 너무 작아 실망은 했지만 렌트카 서비스는 아주 친절하게 너무 잘 해주어 기분 좋게 7인승 밴을 렌트하여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공항을 빠져나온지 십분도 채 안되었는데 뒤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를 세웠다. 그리 빨리 달리는 것 같지 않았은데 8마일 과속이었다고 티켓을 주고 차안에 여섯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앞에 두사람 빼고 나머지는 몽땅 안전밸트 미착용으로 한사람씩 네장의 티켓을 받았다.
다 합하여 다섯장의 티켓을 받아들고 모두 기가 막혀 하다가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한 경고라 감사히 생각하자 라고 서로 위로하면서 앞으로 일주일 출사를 안전하게 잘 보내자고 다짐하며 축 쳐져있던 기분을 애써 가다듬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한국식당 부터 찾아가 돼지불고기, 갈비탕, 순두부 등등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수많은 출사(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를 다녔지만 이렇게 단체로 티켓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아 어디를 가든 조심, 또 조심할 것 같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Palouse 지역에는 한국식당은 물론 식품점도 없기 때문에 식사 후 한국식품점에 들러 햇반과 김치 밑반찬 등 장을 보고 우리들의 최종목적지인 Colfax까지 1시간40분 정도 열심히 달려 오후 네시반쯤 호텔에 도착했다.
스포겐 공항에 12시도 안되어 도착했는데 짐찾고 렌트카 빌리고 경찰한테 잡혀 티켓 받고 식사하고 시장보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네시간 반이나 소요했다.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시간은 제외하고 집에서 공항에 갈때도 네시간반 도착하여 목적지까지 소요시간도 네시간반, 너무도 먼 길을 달려왔으니 최고로 좋은 작품을 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잠시 부려본다.
팔루스는 아이다호주 오레곤주 그리고 워싱턴주 동부지역 이 3개주가 만나는 비옥하고 독특한 초원지대이다. 요즘은 구글(Google)에 들어가 알고 싶은 걸 치면 모든 걸 상세하게 설명해주니 특별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팔루스라는 지역의 밀밭은 많은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기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려한다.
3개주가 만나며 3개의 강이 흐르는 이 비옥한 초원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밀 생산을 많이 하는 곳이다. 3개주를 걸쳐 펼쳐지는 Palouse안에 내가 다녀온 “Steptoe Butte State Park” 는 워싱턴주의 밀밭풍경을 가장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다.
워싱턴주 콜팩스시(Colfax Washington) 남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150에이커의 거대한 공원이며 콜팩스시에서 13마일 거리이다. 맑은 날엔 정상에서 약 70마일의 거리까지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내경험으로는 끝을 볼 수 없는 곳이다.
3612피트 높이의 거대한 규암덩어리인 Steptoe Butte 공원은 어릴 적 옷핀으로 파먹던 고동처럼 산을 뱅글뱅글 돌며 정상까지 차가 다니는 길이 있어 이제까지 다니던 그 어떤 출사지보다 편안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곳이다.
골무모양의 규암버트를 돌다가 찍고 싶은 풍경이 있으면 그냥 옆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매지 않아도 되고 걷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럭셔리한 출사인가
3612피트 정상에 올라가면 화장실(입구에 하나있고 공원 전체에 이곳 하나뿐이다.)이 있고 입구에서 입장료(10달러)를 미처 내지 못했다면 이곳에서 낼 수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360도를 뱅그르 돌며 150에이커의 다양한 컬러가 출렁이는 끝없는 밀밭풍경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건 날씨가 아무리 따뜻해도 정상에는 늘 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얇은자켓은 필수로 가지고 다녀야 하지만 바람 때문에 행그라이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으는 멋진 모습을 출렁이는 대지와 함께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좋다.
정상에서 보는 대부분의 초록빛은 잔디가 아니라 밀, 보리, 완두콩, 작두콩, 핀토콩, 랜즈콩 등이다.
토양이 깊은 곳은 과거부터 오랫동안 화산에 의해 만들어진 현무암이고 이 농지의 예술적인 굴곡 언덕은 지난 이백년 동안 커다란 먼지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토양은 정부에서 주관하는 3모작, 4모작으로 언덕과 땅의 컬러가 다양하고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농부들이 작업하며 지나가는 트랙터가 그려놓은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그림 또한 좋은 피사체가 되기도 한다.
Steptoe Butte공원 풍경을 사진가들이나 관광객들은 대부분 정상에서 즐기곤 하지만 차로 운전하여 들판을 누비고 밭도랑길을 다니다 보면 더욱 다양한 풍경과 멋진 피사체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축사나 새싹이 돋아나오는 밀밭의 모양이나 다채로운 봄의 색깔을 만날 수 있고 토양속의 미네랄 성분으로 인해 오렌지컬러나 보랏빛등 다양한 토양컬러를 담을 수 있다.
4월에는 브라운이나 오렌지, 보라빛 등 땅의 컬러와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밀의 연초록이 섞여있어 다양한 컬러 라인을 표현할 수 있고 5월이나 6월엔 싱그럽고 풍성한 초록을 만날 수 있다.
초록빛 능선에 내려 앉은 일출빛이나 노을빛은 정말 환상적이다. 7-8월에는 황금들판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춤추는 황금물결을 보는 듯 상상이 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온통 초록물결보다는 땅의 브라운이나 베이지 또는 핑크나 보랏빛 컬러 등이 초록과 함께 어우러지는 4월이나 5월이 좋다.
Steptoe Butte 공원 정상에서 촬영할 때는 피사체들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광각 또는 표준렌즈는 사용하기 힘들고 망원렌즈(100-400mm)를 주로 사용해야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을 내가 원하는 프레임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를 타고 다니면서 밀밭 가까이에서 촬영 할 때는 표준렌즈나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평화로운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봄(4월~6월)이 오면 언덕마다 끝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색깔의 물결을 담기위해서 세계의 많은 사진가들이 몰려드는 성수기이기 때문에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호텔 예약을 일찍 서둘러야한다.
특히 5월엔 유채꽃(미국에서는 Conola 라고 부른다)이 피기 시작하여 사진가들을 더욱 유혹하기 때문에 서둘러야만 공원에서 가까운 호텔을 예약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한달전에 예약을 시도했는데도 주말(금,토)에는 비싸기도 하지만 근처에 방이 없어 두시간 정도 떨어진 Palouse Falls 이 있는 Ritzville 이라는 도시로 이동하여 주말동안 Palouse Falls 를 촬영하고 일요일 저녁 다시 두시간을 운전하여 colfax로 돌아와야 했다.
언제나 변덕스러운 여자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대부분 갈대와 같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곳 팔루스에서는 구름을 변덕스러운 여자의 마음 같다고 한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흐르며 구름이 그려 내는 그림자는 출렁이는 파도처럼 순간순간 변한다.
새벽 일출 때는 대지에 빛을 뿌리며 모든 것들을 깨우고 밀알 하나하나 빛을 따라 움직이며 파도같이 신비한 패턴을 그려놓는다.
특히 일출 빛은 볼 때마다 언제나 처음 보는 풍경같이 설레며 감동적이다. 계란노른자처럼 고소하고 사이다처럼 짜릿한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땅은 태고의 자연처럼 변하지 않지만 대지위에 밀밭은 구름이나 일출빛 또는 석양빛으로 인해 다양한 컬러와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자기의 할 일을 조용히 해내고 있다.
사람들은 존재의 가치를 늘 부재를 통해 알게 된다.
삼모작 사모작을 하는 밀밭에 밀이 심어져 있을 때는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땅의 속살을 볼 수 없지만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고 벌겋게 드러내 놓고 휴식하는 토지를 보며 나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음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토지를 보며 나도 아니 내 마음도 삼모작이나 사모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자랑인양 입에 달고 산다. 열심히 생각하고 또 한편 열심히 바쁘게 일도 하지만 또 한구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며 비워놓고 쉬게 할 수 있는 그런 내 마음에 빈방을 하나 가질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올 곳이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여행자가 아닌 떠돌이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짜릿한 한가지를 얻어간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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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젬마 (여행작가, 한국사진작가협 워싱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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