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11월이 되면 마음 한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힘든 때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헐벗어가는 나무와 길가에 버려진 듯 쓸쓸히 뒹구는 낙엽 때문이 아님을 나중에 알았다. 서머타임 해제 후 급격히 줄어든 일조량과 아침 저녁에 코끝을 시리게하는 찬공기, 그리고 이제 달랑 한장 남은 세월의 무상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7-8년 전까지도 11월만 되면 가슴 한구석이 휑하고 푸른 하늘이 너무 시리고 차갑게 느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뒤늦게 그 이유를 찾고 회복되어 이제는 아름다운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되어 감사하다.
꼭 30년 전 11월 어느날 40대 중반을 넘어선 친정엄마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직은 엄마의 그늘이 필요한 자식들을 두고 급성 백혈병으로 입원한지 18일만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눈발이 흩날리던 장지에서 엄마를 언 땅에 묻고 올려다본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의 풍경이 내게는 트라우마(trauma)로 남아있다는 것을 20년이 넘어서야 알았다. 11월이 되면 어김없이 불청객처럼 찾아오던 우울감과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던 힘든 마음을 나는 그저 가을을 많이 탄다고 치부했었다. 구름 한점 없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볼때면 나는 어느새 얼어붙은 땅을 딛고 망연자실해서 서있던 18살의 여고생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20년이 넘어서야 알수 있었다.
이런 감정을 심리학적 용어로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이라 한다. 그 것은 심리적으로 충격적이고 강렬한 경험을 했던 날짜가 돌아오면 그때의 경험을 그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체험함으로써 비슷한 감정 상태에 빠지는 심리반응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상실의 경험이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때 그 달이나 계절이 돌아오면 그 때 느꼈던 분노, 아픔과 슬픔 등 상실 후의 여러 감정들을 다시 반복하여 경험하게 된다. 예전에 만났던 한 여성은 꽃 피는 3월만 되면 설명되지 않는 우울함에 빠져든다고 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 여성은 10년도 넘은 과거의 사건, 결혼 전 낙태 기억이 떠오르며 수술 후 나와서 바라본 꽃망울들이 너무 아프고 슬퍼보였다는 고백을 하며 오열하던 생각이 난다.
어떤 사람은 가볍게 지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전쟁에 참여하거나 쓰나미나 지진같은 자연 재해를 겪은 후 발생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만큼의 커다란 심리적 충격이기 때문에 이유없는 우울함이 특정한 시간에 반복된다면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경험 뿐 아니라 집단이 함께 겪은 트라우마로 국민 전체가 함께 기념일 반응을 갖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와 버지니아 텍 총기사건,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와 4.19 혁명 등이 일어난 잔인한 4월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5월, 6.25 전쟁을 겪은 세대의 슬픈 6월, 그리고 9.11 사건으로 인한 아픈 9월 등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집단 무의식 속에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기념일 반응을 겪기도 한다.
개인 상담과 공부를 통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며 20년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돌아가신 엄마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남의 장례식에 가서 상주보다 더 크게 울던 나의 모습이 치유되지 않은 상실의 아픔을 반영한 것임을 알게됐고, 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있지만, 날 위해 살아 계셨어야한다는 나의 이기심과 더 이상 절대적인 내편이 되줄 사람이 없다는 자기연민이 더 컸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엄마를 한 인간으로서 떠나보낸 후 슬픔과 아픔이 아닌 따뜻함과 고마운 사람으로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우리는 이런 비슷한 상실과 애도의 아픔이 한명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슬퍼하는 일이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슬픔인지 아니면 내가 누려야할 것을 잃은 것에 대한 자기연민인지 한번 쯤 돌아본다면 떠난 사람을 ‘바이’하며 아름답게 보낸 후 그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counseling@fccgw.org
<
모니카 이 심리 상담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