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워싱톤 문인회의 공론으로 채택되었던 이순신 문학상이 5년만인 2009년 새로운 회장단에 의하여 폐지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일체의 이론없이 즉각 그 결정을 수용하여 5년에 걸쳐 이룩한 전국화의 실적을 아깝지만 깔끔하게 접은바 있었다.
그렇게 한 데에는 가부 결정권은 그들의 몫이기도 하였지만 충무공 이순신을 가벼이 보는 듯한 그들의 손을 빌어 이순신 문학상을 억지스럽게 끌고 가는 것은 충무공에 대한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금년, 9년만의 워싱턴 이순신의 부활을 맞아 일부 문인회 중진들이 이순신 문학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을 배우는 학도로서 이를 바로 밝힐 의무를 느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중 한 분은 ‘이순신 하면 장군으로 알려져 있어 문인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순신 문학론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니 아연할 따름이다.
이에 대해 나는 서울대학교 박혜일, 최희동, 배영덕, 김명섭 네 분 교수의 공동집필 역작인 서울대학교 출판부 간행 2002년판 ‘이순신의 일기’에서 이순신의 문학성을 기술한 부분 전문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 그는 본시 시를 읊고,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천부의 문인이었다. 』 조경남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에서 지은 시가 20수나 된다고 한다. 많이 유실된 것 같다. 국문학자 조윤제는 1937년에 간행된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에서 조선중기의 시조문학 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중의 한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시인 이병기는 이순신의 시와 서간문, 그리고 <난중일기>에서 몇몇 귀절을 국문으로 옮겨 인용하며, “… 그 간곡한 충정이 주옥같이 그려 있다. …”, 또는 … 舞文弄墨 (무문농묵 -글줄이나 되뇌이며 글자나 끌적거리는) 여간의 문필가 따위로는 도저히 비양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고 하여 이순신의 인품과 더불어 그의 고고한 문학에 깊이 감복하고 있다. (이병기, <충무공의 문학>, 진단학회 편, 1950년). 이에 의하면 국문학의 개척자 가람 이병기 시인은 이미 1950년에 ‘충무공의 문학’이라는 제목의 진단학회편 저술에서 이순신의 문학성을 논하고 있으니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순신 문학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고시가의 석학 양주동은 여대생들이 역대 시조 근 1,000수 중의 최고작을 묻기에 홍랑(洪娘)의 ‘묏버들’ 한 수를 그것이라 이르고 수다스러운 명강의를 펼쳤으나 반응이 저조하여 “저 충무공의 한산섬 한 수 - 그 깊디 깊은 인간의 悲傷(비상), 그 위대한 인간성의 표현인 그 한 수 를 장원의 최고작으로 받들어 여대생 전원의 박수를 얻었다는 해학적인 수필을 남기고 있다. (서울신문 <교단잡기> 1962년 11월 7일자).
위에 거론된 가람 이병기 선생은 우리나라 국문학을 개척한 시조시인으로 서울대 교수와 전북대 문리대 학장을 지내고 ‘역대 시조선’ ‘어우야담’ ‘국문학 전서’ ‘국문학 개설’ 등 주옥같은 역작을 남겼고 조윤제 박사는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과대 교수와 학장을 지낸 분으로 1930년대 한국 고전문학의 체계를 세운 국문학의 개척자로 방대한 ‘한국 문학사’를 저술한 중진 국문학자이다.
또 자칭 걸어 다니는 국보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는 국문학과 영문학을 아우르는 해박한 어문 실력과 입담 좋은 명강의로 일세를 풍미하며 동국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 밖에도 ‘내 고향 남쪽 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의 중진 국문학자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충무공 시문에 심취하여 많은 연구를 하신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상식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대표 국문학자들이 한결 같이 이순신의 문학성을 극찬하고 있는데 유독 워싱턴 문인회의 일부 인사가 일그러진 잣대로 충무공의 문학성을 폄하하는 심성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인 1593년 7월 15일자 난중일기의 끝은 4자 8운으로 맺고 있어 일기가 그대로 한 편의 시를 이루어 가람 이병기 선생의 표현대로 이순신의 번뜩이는 문학성을 엿 볼수 있게 한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배뜸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로운데
달빛이 뱃전에 들어와
정신이 오히려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에
어느덧 첫 닭이 우는구나
일기의 한 부분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넘치는 문학성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충무공은 ‘금토패문에 답하는 글’이라는 수려한 외교 논설과 ‘송나라 역사를 읽고’라는 날카로운 독후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7년 전쟁을 일기로 기록한 대하 실기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난중일기’ 등 수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 어느 기록 하나를 읽고 이순신을 평할 수 있을 것인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
이내원 이순신 숭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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