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뉴욕 소더비에서 테이프로 벽에 붙인 바나나가 620만 달러에 낙찰돼 큰 화제가 되었다. ‘코미디언’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말썽꾼’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64)의 것으로, 이날 경매에서 치열한 입찰 끝에 예상가보다 6배나 높은 가격에 팔렸다.
경매 당일 아침 맨해튼 과일가판대에서 35센트에 구입한 바나나가 어떻게 620만 달러짜리 예술작품으로 둔갑할 수 있느냐고 황당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개념미술’이기 때문이라고 미술계는 설명한다. 과연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해하고, 볼 것도 없고, 쓸데없이 썰만 많으며, 아름답지도 않은 현대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2019년 마이애미 ‘아트바젤’에서 페로텡(Perrotin) 갤러리가 처음 전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를 덕 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은 것이 무려 12만 달러였는데, 3개 에디션이 즉시 팔려나가면서 더 화제가 됐다.
그 이후 각종 물체를 벽에 붙인 사진들이 온라인에 나돌며 엄청난 패러디가 쏟아져 나왔는데, 더 재미있었던 건 당시 아트페어를 찾은 한 행위예술가가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나나를 벽에서 떼어내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갤러리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곧바로 새 바나나를 붙여놓았으며 이 때문에 관람객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작품을 조기 철수했다.
이 작품은 2023년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됐을 때도 한 대학생이 바나나를 떼먹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팠다”는 학생에 대해 이번에도 작가와 미술관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며 별다른 조치나 대응을 하지 않았고 새 바나나를 사서 붙여놓았다.
이 해프닝은 존 레논과 요코 오노가 처음 만났던 1966년 런던 전시회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노는 전시회에 파란사과 하나를 달랑 세워놓은 작품을 출품했는데 오프닝 프리뷰에서 레논이 이 사과를 집어서 한입 베물어 먹고는 다시 세워놓았다. 분노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오노에게 레논은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그 일별 이후 이 커플이 어떻게 됐는지는 세상이 다 아는 역사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을 늘 보게 되는 미술관에서, 작품에 손을 댄 정도가 아니라 먹어서 없애버렸는데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개념미술’이기 때문이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은 미술의 재료가 개념 즉 생각인 미술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아름답게 그리는 전통미술과 달리 개념미술은 그런 미적, 기술적, 물질적 결과물과는 아무 상관없고, 오로지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관념만이 중요한 예술이다. 대개의 경우 작가들은 작품을 그리거나 만들지도 않는다. 결과물이 없어도 자신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설득할 수만 있으면 작품이 되는 것이다. 현대미술 전시회에 가면 볼 것이 별로 없고 재미도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코미디언’에서 중요한 것은 바나나가 아니라 ‘바나나를 벽에 붙였다’라는 아이디어이므로 작품 소유자는 바나나가 썩으면 언제든지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소실과 복제가 장려되는 예술이다. 작품을 낙찰 받은 사람은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바나나가 썩을 때마다 이를 교체하는 방법에 대한 정확한 지시사항이 담긴 안내서, 그리고 작가가 서명한 진품인증서를 받게 된다. 개념예술에서 진품증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결국 이것이 작품 자체를 소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작가의 한사람이지만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한 번도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고 성인이 될 때까지 미술관에 가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예술에 대한 선입견이 전혀 없는 배경이 파격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수많은 기괴한 작품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2016년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화장실에 1년 동안 설치됐던 18K 황금변기 ‘아메리카’다. 마르셀 뒤샹의 ‘샘’에 비견되는 ‘아메리카’는 미국의 천박한 부의 과잉을 풍자하는 한편 진짜 변기로 사용할 수 있어서 이를 경험해보려는 사람들이 매일 줄을 서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카텔란은 “200달러짜리 점심을 먹었든 2달러짜리 핫도그를 먹었든, 변기에서는 결과가 똑같다”면서 이 조각품은 훌륭한 평준화 장치라고 말했다.
2018년 트럼프와 멜라니아 대통령 부부가 구겐하임 미술관에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한점을 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 가족이 백악관을 꾸미기 위해 미술관에서 작품을 빌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구겐하임의 수석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아메리카’ 황금변기를 설치하라고 제안했다. 물론 이것은 트럼프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그녀에게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620만 달러짜리 ‘코미디언’을 구매한 사람은 가상화폐 ‘트론’의 설립자인 중국 출신의 젊은 기업가 저스틴 선(34)이다. 그는 이 작품이 “예술과 밈과 암호화폐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적 현상이며 미래에 더 많은 생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미술은 갈수록 물질을 벗어나 정신으로 가고 있다.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이 돼버리면서 사람들과의 교감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세상은 또 점점 더 빨리 디지털과 암호와 인공지능의 세계가 되어간다. “예술은 사기”라고 했던 백남준의 말과 안데르센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이 더 자주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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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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