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LA 다운타운의 현대미술관(MOCA)에서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엇갈린 랑데부: 윤이상의 음악유산’(Star-Crossed Rendezvous: The Musical Legacy of Isang Yun)이란 제목의 심포지엄이 하루 종일 계속된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음악학자, 미술작가, 역사학자, 작곡가, 연주자들이 초청되어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세계를 다방면에서 조명하고 토론하고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음악기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행사가 열린 이유는 윤이상 음악에 경도된 설치예술가 양혜규의 작품(Star-Crossed Rendezvous after Yun, 2024)이 내년 3월1일부터 모카 그랜드(MOCA Grand)에서 전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견우직녀 설화를 모티프로 한 윤이상의 ‘오보,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더블 콘체르토’(1977)가 사용되는데, 이와 연계해 LA필하모닉이 3월10일 모카와 디즈니 홀에서 두차례 이 협주곡을 연주하게 된다. 두 기관의 물리적 공간을 연결하고, 시각과 청각, 장르와 역사를 아우르는 소리의 여정을 만든다는 시도다.
한마디로 미 서부에서 가장 대표적인 현대미술관과 오케스트라가 윤이상과 양혜규라는 독일에서 활동해온 한국 출신의 두 천재 예술가를 매우 이례적 방식으로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고, 심포지엄은 그 예고편인 셈이었다.
양혜규(54)는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아티스트의 한명이다. 2009년 라크마(LACMA)가 개최한 한국현대작가 12인전 ‘당신의 밝은 미래’에서 우리와 만난 적이 있는 그는 독일 캐피탈 선정 ‘세계 100대 작가’에 포함된 유일한 한국작가이며, 그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세계 주요미술관이 거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에 반해 윤이상은 유럽과 한국에서는 유명하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정민 음악학연구가는 “윤이상은 1966년 미국을 방문했고 탱글우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음악이 연주됐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며 “지금은 현대 음악가들이나 그의 이름을 알고, 작곡과 학생연주회에서나 드물게 연주된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윤이상(1917-1995)은 한국인으로서 국제 현대음악계에 가장 먼저, 가장 멀리, 가장 깊이 나아간 인물이다. 1957년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작곡가로 성장한 그는 유럽평론가들이 선정한 ‘20세기 주요 작곡가 56인’에 포함되었고, ‘현존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을 만큼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서양음악에 동양적 요소를 도입한 독창적인 작곡기법을 개척했으며, 오보를 피리처럼 부리는 등 서양악기로 한국 전통음악을 표현하는 새로운 음악언어를 창조해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동백림 사건’이란 비극적 역사에 묻혀 오랫동안 그 업적이 가려지고 말았다. ‘동베를린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교수와 유학생 194명이 북한의 간첩이라며 서울로 납치하여 고문한 사건이다. 이때 윤이상과 함께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응노, 그리고 시인 천상병까지 끌려들어가 잔인한 고문으로 심신이 크게 망가지는 고초를 겪었다.
윤이상이 투옥되자 독일의 친구들이 한국정부에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 서한을 썼는데, 여기에 서명한 167명 중에는 스트라빈스키, 슈토크하우젠, 리게티, 카라얀, 클렘페러 등 거장들이 수두룩했다. 급기야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까지 “이 야만적인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한국대사를 추방하겠다”고 나서자 윤이상은 무기징역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69년 3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 1995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 땅을 밟지 않았고, 그의 음반과 악보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수입금지 품목이었다.
반면 북한은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딱 좋은 유명인사로 보고, 그의 음악의 연주와 연구에 열을 올렸으며, 윤이상도 북한을 자주 방문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북한에 대한 친밀감은 더 커졌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비판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하고 확대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고, 2018년 윤이상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그토록 그리던 고향 통영에 묻혔다.
1977년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가 ‘상처 입은 용’이라는 제목의 윤이상 대담록을 출판했다. 윤이상이 직접 자신의 생애 전반, 질곡의 시대를 넘어오며 겪었던 겪어야 했던 고초와 그 과정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원천에 대해 담담하지만 담대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음악가의 자서전을 넘어선 역사의 기록이고, 윤이상에 관한 가장 탁월한 텍스트로 평가받는 책인데, 한국에서는 40년이 지난 2017년에야 출판되었다.
올해 타계 30주기를 맞은 윤이상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정치와 예술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통일시키려 했던 드문 천재였고, 음악을 통해 분단된 우리 민족에게 화해와 자긍심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민족운동가였다. 그런데 솔직히 윤이상의 음악도 어렵고, 양혜규의 작품도 어렵다. 내년 전시와 연주가 열릴 때까지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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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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