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그 많던 눈도 거의 다 녹았다. 볕이 잘 들지않는 북향으로 난 길에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 저기에서 눈 녹은 물 흐르는 소리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참새, 멧새, 울새들이 매일 찾아오고 까마귀들은 이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눈 덮인 날들이 오래 계속되던 끝에 허기진 까마귀들이 동네로 날아오곤 했다. 쓰레기를 버리는 날,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 봉투를 쪼아대는 까마귀들을 보았다. 인기척을 내니까 마지못해 날아갔다가 멈추면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
로드킬에 의해 도로변에서 썩고 있는 사슴이나 두더지들의 시체를 쪼아 먹는 까마귀들을 종종 본다. 장엄한 자연의 순리가 거기에 있어서 일까. 처절한 그 광경에는 그래도 어딘가 미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김현승 시인이 그의 시에서 까마귀를 절대고독의 표상으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까마귀를 흉조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시인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그 새에게서 철학적인 풍모를 느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갔었다. 그런 새가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 쓰레기 봉투를 허겁지겁 쪼아대는 꼴이라니. 나는 새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쓰레기 비닐의 밑부분이 부리에 쪼여 날카롭게 뜯긴 자국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찢겨나간 쓰레기 봉투를 새 비닐봉투에 담아서 차고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부엌에서 식빵 한 덩이를 여러 조각으로 작게 뜯어 가지고 나가 쓰레기가 있던 자리에 흩뿌려 놓고 들어왔다. 창으로 내다 보고 있으려니 얼마 있다가 까마귀 한 마리가 빵조각이 흩어진 자리 근처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작은 빵조각 하나를 덥썩 물었다. 조금 있다가 어디선가 또 다른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 또 한 마리가 날아오고, 또 다른 한 마리가 날아오고.. 한 까마귀는 아예 한꺼번에 여러 조각을 입에 물고 눈 녹은 물이 고여있는 곳으로 옮겨가더니 스프위에 얹어먹는 크루통처럼 물에 적셔가며 열심히도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모두 한 가족일까.. 나는 부엌 창에 기대어 까마귀들의 포식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러는 중에 까마귀 울음소리를 기가막히게 잘 흉내내던 한 소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야시마 타로가 쓰고 윤구병이 번역한 그림책 <까마귀 소년>에 나오는 땅꼬마 소년.
산골짜기 오두막집에 살며 산길을 타박 타박 걸어다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육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친구도 없는 먼 길을 타박 타박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몸집도 작고 외톨이인 소년은 육년동안 이름도 없이 오로지 땅꼬마라는 별명으로만 불렸다. 그렇게 육학년이 된 소년은 이소베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소베 선생님은 이전의 선생님들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소년이 그린 그림들과 삐뚤빼뚤한 글씨를 좋아했다.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빈 교실에서 소년이 들려주는 꽃이름과 풀이름, 머루와 돼지감자가 자라는 장소에 대해서 듣는 것을 좋아했다. 육학년을 마치는 학예 발표회 날이 되었다. 학부모들과 손님들이 모인 앞에서 학생들이 자기들이 가진 재능을 한껏 발휘하는 날, 이소베 선생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이 땅꼬마 소년을 무대로 불러내어 소년이 제일 잘하는 것을 시켰다. 소년은 전교생 앞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엄마 까마귀 소리, 아빠 까마귀 소리, 알에서 갓 태어난 까마귀 소리, 배고플 때 우는 소리, 비를 맞으며 우는 소리같은 온갖 까마귀 소리를 흉내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는 산 길을 타박 타박 혼자 걸어가는 땅꼬마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소년이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서 홀로 우는 까마귀 소리를 흉내낼 때, 소년은 목구멍 저 깊은 곳으로 부터 소리를 끌어 올리며 아주 길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울었다....
이 책을 내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마음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났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산길을 타박 타박 걸으며 안으로만 까맣게 가둬둔 외로움을 까마귀 소리로 토해내는 소년의 영상이 잡힐 듯 다가온다. 그 책을 아껴 오래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 책꽂이에 없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 것 같다. 이제는 성인이 된 내 아이들이 아직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눈 녹는 겨울 아침, 굶주린 까마귀떼들이 불러온 까마귀 소년의 기억.
<마진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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