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신문을 읽다 접한 96세의 철학자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가 유난히 마음에 머물러 있다. 그분이 쓴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을 만큼 인터뷰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들이 인상적이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뭘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 이웃, 사회, 국가”라고 답하시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던 것만이 보람으로 남는다고 하셨다. 또 “선생님이 알게 된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답하셨다. 무엇보다 백 년이라는 시간 가까이 살아오신 분의 말씀이기에, 그 대답들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진실한 호소가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의 교정을 걷고 있었다. 새를 좋아하는 나는 여름의 푸른 빛이 가득한 교정의 잔디밭에서 총총걸음을 걷는 까치들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봄의 도착과 함께 미시건의 하늘을 여기저기서 가득 메우는 온갖 산새들의 노래도 무척 아름답지만, 그곳에는 하얗고 까만 순수한 대비색이 수놓아진 통통한 까치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교정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 신사복장의 까치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그전에는 까치들의 자유로운 비상에 마음을 쏟으며 자유의 날갯짓에 내 모습을 포개어 바라보던 내가, 어느 새 멀리서 총총거리며 즐겁게 뛰어다니는 까치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그저 뿌듯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고 나의 자유로움을 꿈꾸던 내가 더는 까치를 통해 자유를 그리기보다는 그들의 한가로운 자유로움을 바라볼 수 있음에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꼭 내게 주어진 자유가 아니더라도 좋으니, 내 앞에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들이 있음에 다만 감사하게 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작고 애틋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자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 뒤에는 수많은 진실한 수고와 마음의 부드러운 풍화작용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을 상대로 한 판 승부대결을 펼친 뒤에 나의 이름과 나의 존재를 세워보려는 치기 어린 마음이 깎여지고, 사랑으로 지키고 싶은 한 연약한 존재에게 자유와 희망을 주기 위해 하루 만큼의 수고를 기꺼이 견디어내는 겸손하고 거룩한 마음을 품게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할아버지 철학자의 진실한 말 앞에서, 철없는 아들 딸의 입가에 어리는 웃음 하나를 마음에 품고 오늘도 세상의 먼지를 견디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퇴근길에 늘 아이스크림이나 빵, 그리고 멜론 같은 커다랗고 부드러운 과일들을 사 오시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눈가가 촉촉해진다. 하물며 아직도 철이 없는 나도 즐겁게 뛰어노는 까치들의 뒷모습에 웃음이 지어지는 데, 사랑하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꿈을 펼칠 그 자유를 마련해준다는 생각으로 고생을 고생인 줄 모르고 짊어지셨던 아버지는 진정으로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나의 명예를 세우는 일도,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일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데에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사랑을 위한 수고는 보이지 않기에 어쩌면 더 소중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난 이 년의 시간 동안 딸을 그리워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떨어져 있는 시간을 견디어내셨을 우리 어머니의 하루하루 수고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매일의 과제들을 기쁜 마음으로 해내려고 애쓴 나의 수고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지만 헤아릴 수 있고, 그렇게 헤아리므로 깊어진 마음에 담기는 사랑의 의미도 더 커지는 것 같다.
자유와 명예, 또 생명보다도 귀한 것, 정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사랑인가 보다. 사랑을 위한 수고를 짊어진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아버지의 사랑이 남아 나의 하루를 다독인다. 이제 나의 하루가 오롯이 사랑을 위한 수고로 채워지기를 기도해본다.
<김선재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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