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겨울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겨울저녁, 몸살에 시달리던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밥을 짓는다. 어릴 적 아프고 난 끝이면 어머니가 지어주시곤 하던 하얀 쌀밥이다.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에서는 향기가 난다. 쌀의 향기, 들녘의 향기. 바람의 향기가 난다. 쌀은 내게 행복한 기억을 불러다주는 곡식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산골의 계절은 들판으로 찾아왔다 들판으로 사라지곤 했다. 볏단을 거둬들이고 나면 회색빛 빈들로 찾아오던 겨울은 길고 매서웠다, 마침내 사월이 찾아오면 거짓말처럼 그 들판에 자운영이 피기 시작했다. 아니 내 불안정한 방식의 기억에만 의존해본다면 꽃은 어느 날 아침이나 하오의 들판에서 갑자기 피어났던 것도 같다. 나는 그 신기한 분홍빛 꽃들에게 정신이 팔려 초등학교를 오가는 길의 발걸음을 멈칫거렸다. 무채색뿐이던 들판이 한꺼번에 토해 놓은 자운영의 꽃빛은 가히 색의 충격이라 할 수 있었다.
한꺼번에 피어오른 꽃들이 충격이었다면 어느 날 하교 길에 풋거름을 만들기 위해 쟁기질로 갈아엎어진 꽃들 역시 충격이었다. 뒤집힌 흙덩이 속으로 언뜻언뜻 보이던 꽃의 잔재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처럼 남기도 했다. 농부들은 그 논에 물을 채워 무논을 만든 다음 써레질을 시작하고 맏며느리 고르듯이 신중하게 고른다는 볍씨를 파종하면서 본격적인 농사일을 시작했다. 농사일이 시작되면 텅 비어버린 집은 뒤란에서 겨울을 버틴 대파가 동그랗게 밀어올린 하얀 대파꽃이나 앞마당에 풀어놓은 닭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주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면 들판은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아무도 모르게, 농부의 눈에만 보인다는 벼꽃이 피었다. 초여름의 이른 아침, 벼들이 이삭마다 껍질을 반쯤 열고 아주 작은 벼꽃을 피워 놓은 채 자가수분을 하는 순간을 맞는다. 농부들도 이 시기에는 모든 벼들이 고요하게 혼례를 치르도록 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소금을 묻힌 듯 꽃을 피워놓는 벼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그들이 제각기 꽃밥을 털고 이삭 집을 닫을 때까지 아침볕이 좋기를, 바람결이 부드럽기를 빌 뿐이었다.
초봄부터 가을이 늦도록 들판에 엎드려 살아야 얻어지는 것이 쌀이었다. 가뭄이 들면 갈라지는 논바닥에 애가 타고 홍수에는 물꼬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쳤다. 다 키워 놓았다 싶으면 꼭 한 차례씩 태풍이 지나갔고 웅덩이가 파인 듯 쓰러진 벼 포기들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심정은 참담하였다. 밥상에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모두 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무논 속에 떠있는 개구리밥으로 소꿉놀이나 하고 비 내리는 밤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게 고작이었던 내가 벼멸구라든가 도열병, 잎마름병이나 피사리 같은 내 스스로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단어들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이삭들이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고 들판의 색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면 농부들은 이삭을 까보며 벼를 베어낼 날을 정하고 마침내 논에서 물을 빼냈다. 동네에 하나뿐인 탈곡기가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며 와릉와릉 소리 내어 탈곡을 도왔다. 알곡을 털어내고 남은 짚은 엮어서 지붕도 갈고 토담 위 용마루도 갈아주고 돼지우리 바람막이도, 김장독 덮개도, 둥구미도, 씨오쟁이도 만들었지만 어린 우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소여물이나 땔감으로 쓰기 위해 텃밭에 쌓아둔 산만한 짚더미였다. 어두울 녘의 짚더미에서 숨바꼭질을 하다보면 한겨울에도 등에서 땀이 났다. 술래에게 들킬세라 짚단 사이에 숨어 가쁜 숨을 몰아쉬노라면 코끝으로는 짚의 향기가 느껴지고 하늘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별들이 눈까풀 너머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반짝거렸다.
고깃국에 이밥 한 그릇이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어린 딸을 남의 집으로 보내고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입에 넣어줄 한 줌 쌀이 없어서 말린 조팝꽃을 사용하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쌀을 얻기 위해,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한평생을 그 들판에 살다 굽은 허리로 생을 마쳤던 그 옛날 농부들의 삶은 고단하였지만 순결한 삶이었다.
우리들의 세포를 이루게 하고 생명을 유지시켜준 밥 한 그릇에는 햇빛과 달빛과 바람과 농부의 땀이 들어있다. 밥 한 그릇에는 풋거름이 되어준 풀들과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사라진 숱한 벼꽃의 결정체가 들어있는 셈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풋바심으로 거둔 올벼쌀로 지은 밥에서 나던 향기를 기억한다. 섣달 그믐께가 되면 새경으로 받은 벼 몇 섬을 지고 노모가 계신 집을 향해 재를 넘어가던 머슴아저씨의 뒷모습도 기억이 난다. 가난하고 춥고 애달픈 시절, 쌀은 모든 이들의 몸과 마음을 덥혀주는 고마운 곡식이었다.
쌀도 밥도 음식도 흔한 세상이 되었다. 턱찌끼 남기지 말라 훈계하시던 어른들도 다 떠나시고 밥 먹었느냐 인사하고 밥 한 끼 나누자 청하던 정서도 옛것이 되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고 소원했던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을 불러 밥 한 그릇 나눠먹으면 좋을 것 같은 계절이다. 마주앉아 나누는 더운 밥 한 그릇 만큼 서로를 따뜻하게 끌어당기는 게 또 어디 있을까, 따뜻한 것이 그리운 계절, 십이월이 깊어가고 있다.
pinkmd411@hanmail.net
<김용미 수필가 /포토맥,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