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코스모스가 피어서 좋다. 코스모스가 화사하게 피어 가을을 좋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말이다. 애절하고 낭만적이면서 격정적 감정을 내면에 접어 둔채 속삭이는 듯한 애정을 드러내는 코스모스·봄의 발정과 여름의 격렬을 침착하게 흡수하곤 뿌듯한 보람을 셈하는 가을… 내게 있어서 가을과 코스모스는 한 해를 사는 이유이고 그 다음해를 기약하는 원천이다. 인위적 꾸밈으로 치부되겠지만 실제 감상은 가을과 코스모스 앞에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다.
세월은 우리를 순화시켜 놓았다. 연륜의 흐름따라 익을 대로 익어버린다. 산전수전 풍파가 지나가고 순수의 본령에 들어서 있다.
코스모스에는 가슴속 저며둔 사랑의 추억이 살아있다. 애잔한 순정과 그리움에 조용히 몸을 떠는 애련이 있다. 고교 국어책의 ‘청춘예찬’, 그 내용도 들어 있다. “아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얼마나 가슴설레이는 말이냐!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고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거선의 기관소리와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가을날 코스모스 앞에서 심금이 울고 환희 또한 오버랩 되는 것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정신적 자산이다.
코스모스는 볼수록 겸손하다. 아무데서나 잘 피어나는 것은 양처검소의 덕목이다. 군집을 이루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린다. 하늘하늘 청순미가 흔들릴 때면 모나코 국왕 레이니에 공에게 시집가 살다 세상을 떠난 그레이스 켈리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누라를 처음 만났을 때 코스모스라고 느껴 아내로 삼았다. 그 코스모스 인상을 가슴 깊이 안고서 사랑의 원류로 삼고 살아간다.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한 아내에 대한 애정은 영원히 피어날 것이다. 모든 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하자가 있다. 땡볕 더위에도 시들지 않는 피튜니아는 너무 강한 인상이다. 포인세티아는 크리스마스 인기스타. 한철가면 시들해진다. 아무리 추워도 만개를 고집하는 팬지는 왠지 외롭고 슬퍼 보인다. 국화는 늦가을 스산한 우수를 안겨와 범접에 부담이 간다. 난은 귀족들의 기호품이 아닌가. 사뭇 반항이 인다. 근엄도식의 냄새가 짙다. 고관대작들이 수선화 부까지 읊조리며 애지중지 했지만 수선화야말로 중국으로부터 온 사치품이란 전력을 지녔다.
나의 코스모스 칭송에 하자가 있을까. 코스모스(Cosmos)는 이름 자체가 ‘우주’다. 모두를 아우른다.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진하게 마음을 보내라고 코스모스가 세상에 왔나 보다.
베토벤의 사랑의 노래 ‘엘리제를 위하여’… 노래로 불러도 피아노 연주로 들어도 길게길게 여운이 남는 애수를 띤 그 ‘엘리제’는 코스모스를 연상케 한다. “코오스모오스 한들 한들 피이어 날 적에”… 김상희의 노래가 생각난다.
코스모스를 좀 더 깊이 음미해 보라. 견실한 품격과 생의 진미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길(La Strada)에서 쥴리엣다 마시나를 잃은 안소니 퀸이 나는 정말 홀로야.. 를 절규하며 파도 철썩이는 바다로 가는 그 길에 코스모스가 줄줄이 피어 늘어서 있던 그 장면은 지금도 콧잔등을 시큰거리게 만든다. 반 고흐가 즐겨 그린 해바라기엔 권총자살 직전의 비극이 충격으로 남아 있다.
이번 가을에도 코스모스 길게 길게 늘어선 시골길을 함께 걸어보자. 그냥 가보지 말고 가슴 가득히 사랑을 담고 코스모스 향기에 취해 보자. 오래 전부터 아껴오던 추억이 되살아 나고, 살아가는 날들에 희망과 의욕과 열정이 뜰 것이다. 그 애틋했던 장면들이 코스모스로 장식한 가을날을 축복해 줄 것이다. 저물어 가는 가을날, 최고 찬미의 장면은 코스모스와 어울려 격조가 높아질 것이다. 마누라가 더 존귀해지고 진한 애정이 생동하면서 새삼스레 가을의 새 맛을 불러다 줄 것이다.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가을 들판에서 지금까지 살아 온 사연들을 쉬지 않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밤하늘에 별이 뜬다. “여보 마누라 우리 삶도 이만하면 짱이었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보석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벌판에 피어난 수 많은 코스모스들의 축복까지 보탠다면… 이 가을은 정말 환희의 가을일 것만 같다. 아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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