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열기로 숨이 콱콱 막혀 오는 삼복더위 한여름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우노라면 씻은 듯 더위가 가신다. 세상이 내 것이나 된 것처럼 시원해지고 함께 곁들여 오는 만족감이란 말 그대로 지상 최고의 맛이다.
이 찌는 더위에 입에 술술 녹아 넘어가는 냉면을 먹으며 새삼스레 우리 조상님들의 슬기와 존경심에 민족적 자존심마저 느껴진다. 웬 민족적 자존심이라니…엉뚱한 발상이라고 단박에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이 맛좋은 냉면을 먹으며 한국인의 우수함을 느끼지 못하다니 당신이 한 수 아래인거야, 라고 대응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라고 냉면 민족 자존심론을 평가하기 십상이겠지만 정말 전혀 근거 없는 발상이란 말인가. ‘돈키호테’를 쓴 작가 미겔 세르반테스가 이 작품의 주인공을 통하여 우리 인류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가를 잘 살펴봐야 한다. 단순히 작중 인물 돈키호테가 삐쩍 마른 나귀 등에 앉아 구부러진 장창을 꼬나 잡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우스꽝스런 그런 행동만을 보고 비웃어 버린다면 수박 겉핥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형무소에서 나와 16세기, 그 당시로서는 56세의 늙은 나이에 쓴 작품이 돈키호테다. 그는 당시 스페인의 무소불위의 왕권과 고위층이나 고관들의 일방적 독주 횡포, 그에 따른 서민 대중의 피압박 설움을 풍자하려 했던 것이다.
당당한 냉면 민족 자존심론을 코웃음거리로 치부하지 말라. 해외 이 땅에서 냉면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번 쯤 생각해 보라. 전 세계 어느 민족이 한여름에 이렇게 시원한 냉면을 만들어 먹는 슬기를 지녔단 말인가. 청년 시절 미국에 오면서 외국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며 틈틈이 몇 가지 항목을 숙독했었다. 단군 선조의 건국이념 ‘홍익인간’론을 비롯 서양 보다 200년 앞선 금속활자 사용, 미국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보다 훨씬 앞선 정평구의 비행날틀 실험, 최무선의 화약 발명, 불가사의한 팔만대장경, 을지문덕의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킨 살수 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어디 그 뿐인가. 세종대왕의 한글과 장영실의 물시계, 측우기, 이순신의 거북선과 지금도 미 해군 사관학교를 비롯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 해군들이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명량대첩 등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 나이 먹어 이국땅에서의 뒤늦은 발견이라고 할까, 깨달은 것이 냉면이다. 그렇게도 가난했던 우리가 이런 기막힌 음식, 냉면이란 것이 있었기에 더위를 견디고 굶주림을 이겨내는 저력의 바탕으로도 한 몫을 했다고 믿는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 어느 나라 특수 지방에서 여름에 찬 음식을 먹는 경우는 혹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냉면은 전국적이다.
냉면을 꼽으라면 함흥냉면, 평양냉면, 진주냉면이 아닌가. 단백질 보충으로 편육도 몇 조각 썰어 넣고 계란도 삶아 얹고 배를 비롯한 각종 과일 김치 종류가 첨가되기도 한다. 회냉면도 있고 가자미 식혜를 곁들인 비빔냉면 등은 세계 어느 부호도 아직 맛보지 못한 천하일미 아닌가. 냉면이 우수한 식품이라는 것은 계절 음식일 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기호식품으로도 손꼽히는 데에 있다. 국물은 그냥 맑은 물이 아니다. 꿩고기를 마냥 고아 우려낸 국물이라야 제격이다. 지금은 꿩을 사육하는 시대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 꿩 사냥이 여의치 않을 땐 닭고기 육수로 대신 했다. ‘꿩 대신 닭’이란 말이 냉면에서 유래됐다고들 한다. 물론 서양 사람들은 여름철 빙수나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지만 설탕과 향료 모두 가공식품이고 당뇨가 있는 사람에게는 정 떨어지는 음식이다. 빙수와 아이스크림은 끼니로 채울 수 없는 다분히 군것질 요소다. 냉면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만들어 먹었던 매우 민주적인, 서민적인 음식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냇가에 흐르는 자연수를 그대로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게 정설이다.
아무튼 냉면을 먹으며 무더위를 내쫓고 시원한 기분으로 민족적 자존심이 느껴지는 것이야 말로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조상들에게 새삼 감사를 느낀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하여 인류에게 제시한 메시지처럼 나는 이 자랑스러운 조상의 슬기에 흠뻑 취해 냉면을 먹으며, 먹을 때마다 민족적 자존심을 느껴 본다. “자, 아가씨. 냉면사리 하나 더…” 저절로 자동차가 냉면집을 향하고 있다. 여기 워싱턴 교포들이 ‘한국 냉면의 날’이라도 정해놓고 외국인들과 모두 한자리에 모여 냉면축제라도 벌여보면 어떨까. 역시 돈키호테 같은 발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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