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오후에는 남편과 함께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에 갔었다. 블루리지 산맥의 기슭에 박혀있는 작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남북전쟁 당시 집중공격을 받았던 흔적은 지워지고 언덕 위의 오래된 성당이며 붉은 벽돌집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있는 모습은 평화롭기만 했다.
우리는 제법 매운바람이 부는 언덕길을 올라보고 옛날 간이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에 앉아 절벽 속 동굴로 사라지는 기찻길을 바라보기도 했다. 입구에 달아놓은 작은 종들이 손님이 왔다고 달랑거리는 앤티크 가게들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길가의 올망졸망한 가게들을 둘러보던 중 빈티지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눌하게 손바느질을 배우던 여학교 시절이 생각나는 프랑스자수 액자였다. 레이지 데이지스티치로 수를 놓은 진홍색 꽃잎 몇 장 밑에 적혀 있는 세 줄의 글이 미소를 짓게 했다. “Good moms have sticky Floors, Messy Kitchens, Dirty Ovens, And Happy Kid." 과연 내 아이들은 행복한 아이들일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라는 이름의 따뜻한 둥지이기는 한 것일까. 나는 바람 불던 하퍼스 페리를 기억하기 위해, 가끔 내 아이들의 행복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기 위해 한 뼘만 한 액자 하나를 샀다.
산 속 마을에 저녁 어스름이 찾아오는 시각은 생각보다 빨랐다. 어디선가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를 것만 같은 풍경 속에 서있으니 배가 고파졌다. 벽난로에 장작불이 지펴있는 작은 레스토랑을 찾아들어갔다. 철이 늦은 탓인지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오래 되어 보이는 테이블 위에 더 오래 되어 보이는 은스푼과 은포크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주인이 권하는 대로 비프스튜를 시켰다. 장작을 아낌없이 던져 넣어주는 주인 아가씨는 친절했고 굴참나무 타는 향기는 깊었으며 스튜의 맛은 부드럽고도 따뜻했다.
레스토랑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언덕 위의 성당도, 격자유리창의 작은 가게들도, 강가의 백양나무숲도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낮선 곳에서 만나는 어둠은 겨우 한나절 떠나온 집을 그립게 만들었다. 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 그리고 메릴랜드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이정표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까지 했다. 철교 밑 불빛 아래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포토맥 강물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애잔해졌다.
강물은 어두운 밤에도 쉬지 않고 흘러 어느 시점에선가 내가 사는 마을의 곁을 지나 바다로 갈 것이다. 한나절도 안 되는 일탈에서 돌아오는 길, 멀리 반짝이는 것이 하늘에 떠 있는 별빛인지 드문드문 박혀 있는 집들의 불빛인지 아득해지며 나는 꿈결인 냥 잠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너무 바쁘고 고달프게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도 머리도 흐려지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자못 낙담이 되기도 했다. 좀 쉬어가라는 몸의 권유로 알아듣고 가끔은 몸도 마음도 일에서 떠나 자유롭게 혼자서 흐르는 시간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오후를 비워두고 쉼표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하퍼스 페리를 찾던 그 한나절의 시간이나 주방에 걸어놓은 액자 속 밥풀만한 데이지꽃잎 몇 장처럼 쉼표란 그리 호사스럽지 않은 것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베토벤 곡 연주의 대가로 알려진 슈나벨에게 누군가 연주의 비법을 물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보다 쉼표를 잘 연주할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음표와 음표 사이의 정지, 바로 그 침묵의 자리를 어떻게 둘 것인지에 따라 명곡이 결정된다면 그 쉼표의 자리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에 따라 명연주자는 결정될 것이다.
거문고 같은 현악기의 줄은 끊어질 듯 팽팽한 상태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만 오랫동안 그 상태로 조여 놓고 있으면 마침내는 제 소리를 잃게 된다고 한다. 선율에도 쉼표가 없다면 그것은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삶의 적당한 자리마다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 참 행복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밤이 깊어가고 있다. 십이월이 깊어가고 있다. 밤 열한 시가 하루에 쉼표를 찍는 시간이라면 십이월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온 지구가 한 해에 쉼표를 찍는 지점 쯤이 될 것이다. 건너편 자작나무들에 가려졌던 집들 몇 채에서도 불빛이 꺼진 지 오래인 밤, 온 집안의 불을 차례대로 내리고 나만의 등불 하나를 켠다. 주방에선 아까부터 주전자에 차가 끓고 있다.
한 평생을 교사로 사신 아버지가 퇴직하신 뒤 허전한 맘을 달래기 위해 산에 다니신 적이 있었다. 그때 손수 만들어 보내주신 차이다.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이나 되풀이한 다음 볶아서 만드셨다는 차를 아껴 간직했었다. 차에서는 은근한 산의 향기가 난다. 아버지는 멀리 하늘나라로 가신 지 다섯 해인데 차에서는 아직도 보푸라기 같은 머루 꽃을 피우고 달착지근하게 다래를 익혀주던 그 수더분한 산의 향기가 난다.
등불 밑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를 다시 읽는다. 뉴햄프셔 농장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았던 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쉽고, 맑아서 좋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오늘이라는 하루와 통째로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 프로스트의 시 속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창밖에는 먼 길을 달려온 밤바람 한 줄기가 집 모퉁이의 측백나무 우듬지를 흔들고 있다.
사랑했던 아버지도, 자연을 노래했던 늙은 시인도 지상에 마침표를 찍어놓고 별처럼 아득히 먼 곳에 계신데 차의 향기는, 시의 여운은 아련하게 남아 나의 하루에 쉼표를 찍어주고 있다. 주전자가 끓는, 십이월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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