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일몰 시각이 빨라지고 있는 저녁, 가게 일을 마치고 차에 오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넓고 빠른 길도 있고 중간 속도를 내며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며 아주 좁고 느린 일차선 국도도 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마지막 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것은 동살에 집을 나서 그 해가 이울 때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내 지루한 일상에 대한 작은 일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은 제한속도도 느리고 중간에는 외다리까지 하나 놓여 있다. 그래서 어쩌다 다리 앞에서 신호등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건너편의 차들이 건너오기를 기다리느라 다소 지루한 기분을 견뎌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 사이로 매달려 있는 빨간 신호등을 바라보며 홍시를 연상해 본다거나 노루꼬리만큼 남아 있던 해가 서쪽 숲으로 간단없이 넘어가 버리는 걸 목격하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늘도 그 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나무들도 저마다의 그림자를 거둬들이는 시각, 하늘엔 노을만이 붉다. 그 붉은 저녁노을에 머리를 감고 있는 산수유 열매를 보니 가을이 깊어지고 있나보다. 불현듯 찾아왔다가 다시 불현듯 떠나가는 계절이 가을이다. 오른편 숲에서 튀어나온 잿빛 다람쥐 한 마리가 길을 건널 셈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애초의 길은 저런 다람쥐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쫓아 조금 더 큰 동물이 가고 다시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아가며 생겨났을 것이다.
구부러진 길을 달리다보면 길을 향해 허리를 굽힌 나무들을 자주 만난다. 오래 전 사람들은 이 길을 내며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때문에 에둘러 길을 냈으리라.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새 길을 만들며 산의 허리를 자르거나 물줄기를 돌려놓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하버드대학 교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에세이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제목만으로도 말해주는 게 많다. 슬로우 시티나 슬로우 푸드, 슬로우 육아라는 신종 언어가 생긴 것만 봐도 이제 사람들은 속도에 지쳐가고 있는 듯하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길은 방향이 맞는지, 속도만을 따라 떠밀리듯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가끔은 멈춰 서서 생각해봐야 할 일 같다. 늙은 갈참나무의 깍정이를 떠난 열매가 차의 등으로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저녁, 앞서거나 뒤서는 차들도 서두르는 법이 없어 보이는 이 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갈 수 있어서 좋다.
길과 나란히 어깨를 겯고 나 있는 산책로에는 언제나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곤 한다. 전기 줄에 한쪽 어깨를 베어내준 자작나무 밑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자를 만나고 유아용 자전거를 뒤에 매단 채 한가로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남자를 스쳐 지난다. 늙은 백양나무들이 하늘을 이고 있는 공원 어귀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중년의 부부를 만난다. 남편을 의지하고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지난여름보다 많이 야위어 있다. 계절이 깊어지고 나면 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두툼한 스웨터를 걸친 아내의 모습을 차의 뒷거울로 한 번 더 확인하며 강변도로와 만나는 세 번째 삼거리를 향해 살짝 페달을 밟는다.
세 번째 삼거리에 다다르면 포토맥 강변을 거쳐 온 차들을 만난다. 신호등이 없는 길에서 만난 차들은 짧은 조우를 마친 뒤 서두를 것도 없이 차례차례 다시 길을 간다. 큰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은 경쟁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만 한적한 길에서 만나는 차들은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옛길에는 삼거리가 많았었다. 그래서인지 삼거리가 많은 이 길을 가다 보면 마음이 아련해지며 어릴 적에 걸어 다녔던 길들이 생각나곤 한다.
봄비에 싸리꽃잎이 흰 눈처럼 떨어지고 가을이면 도꼬마리들이 장난치며 옷에 들러붙던 그 산길들이며 노란 탱자울타리를 끼고 나 있던 고샅길이 생각난다. 어른들이 작대기로 이슬을 털며 앞장서주시던 들길이 생각나고 말가웃의 곡식이나 보리 질금 두어 됫박, 흙 묻은 푸성귀를 머리에 인 할머니가 걸어가던 신작로도 자주 기억이 난다. 미루나무 잎들이 하얗게 배를 뒤집는 쪽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알아채고, 베어낸 벼 포기 위에 쌓인 눈이 하얀 밥사발 같다고 생각하며 자라던 그 길들 위에서 내 감성의 기초가 세워질 수 있었던 건 축복이 아니었을까. 구부러지고 어눌했던 그 길들이 나를 키웠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큰길로 합해지기 직전에 한 번 더 돌아야 하는 모퉁이 집의 뜰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일홍의 검붉은 꽃잎들이 꽃받침 위에서 그대로 시들어가고 있다. 백일홍들이 꽃 피우기를 그만둔 것만 보아도 가을은 깊을 대로 깊어지고 있나 보다.
길은 좁고 구부러져 있을수록 많을 것들을 품고 간다. 구부러진 길가에는 많은 생명들이 산다. 나무나 풀, 하물며 질경이 같은 것들도 그 길가에 엎드려 살며 사람들의 발자국이나 차의 바퀴에 묻어 작은 생명을 퍼트리며 산다. 물길도 그 흐름이 빠른 곳에서는 물고기나 물풀 같은 생명들을 키우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넓고 빠른 길로만 살아온 사람들은 세상에는 좁고 구부러진 길들이 허다하고 그 길을 힘들게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따뜻한 배려를 배울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행여 내 삶의 길이 좁고 구부러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가는 동안 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길을 가면 좋을 것 같다. 좁고 구부러지고 어두운 길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북서쪽으로 기우는 해 아래 흔들리는 풀꽃이라든가 생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잎들, 허리가 살짝 휘인 초승달을 바라볼 수 있는 건 천천히 가는 길 위에서만 가능하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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