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 맑은 구름, 순하게 부는 훈풍. 김경암 스님의 49재를 지내는 날씨는 그랬다. 법당으로부터 들려오는 구슬프고도 청아한 목탁소리, 소리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뜰 안의 나무와 초목, ‘아제 아제 바라아제~’ 신도들의 독송 소리, 그 자리에 앉아 스님을 추모하며, 휘저었던 대야 속의 흙탕물이 맑아지듯 모든 것이 고요히 가라 앉는다. 그러니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성프란시스 교회에서 동양화가이기도 하신 스님을 모셔다 동양화를 배웠다. 8주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말 한 두 마디만 섞어보아도 사람의 ‘인성자료’(Human Document)는 드러나기 마련인데, 무려 8주간이란 시간은 그림 수업 이상의 의미를 띠며 서로가 참 이웃이며 사랑의 실천의 대상임을 재인식하기에 충분했다. 더 나아가 깊은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웬만해선 스님들의 눈물을 구경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의 눈물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만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의 스타일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성령의 감동 감화를 그릇에 담아내는 기독교에서는 눈물이 많다.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십자가 우울증 환자들”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때로는 천박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울고 나면 후련하다. 그래서 은혜도 많다. 우는 것은 인격의 잣대를 뛰어넘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비움’인 것이다. 즉, 위대한 탄생을 위한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아름다운 동태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울며 엄마의 몸에서 핏물을 뒤집어쓰고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며 천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루는 스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 날은 스님의 생신날이었다. 그림 지도를 위해 스님이 도착하기 전 성프란시스 교우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축 생신 경암 스님”이라고 쓰여진 생일케이크가 준비되었고, 그 위에는 지구가 스님의 인생의 햇수만큼 돌아준 수를 나타내는 초가 준비되었고, 또한 수련생들이 그려낸 작품들을 벽에 붙여놓고 그 그림 뒤에 각자가 준비한 선물로 1불, 5불, 10불짜리 지폐를 붙여놓았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스님이 내려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스님께서 친교실로 내려오시자 우리는 때 맞추어 켜놓은 케이크 촛불과 함께, “생신 축하 합니다” 합창을 했다. 근엄하신 노 스님의 얼굴에 긴장감이 도는 듯하더니 스님의 장삼 옷소매는 어느덧 주인의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도 손등이 자꾸 올라간다. 케이크를 자르고 난 뒤, 벽에 붙여진 그림 한 장, 한 장을 떼어내며 그 뒤에 숨겨진 “보물찾기”놀이는 우리들 모두를 동심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함성과 폭소, 박수 소리, 오고 가는 정, 채워지는 사랑. 훗날 보림사를 가보니 그 그림들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었다.
그 동안 스님과 내가 함께 공유한 기억은 아마 책으로 쓰자면 두꺼운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언젠가 어떤 분이 스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다고 한다. 이 분은 교회보다 절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분인데 그것 때문에 몇 달을 고민하다가 스님께 여쭈었다고 한다.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에 대한 스님의 답은, “가세요, 절에는 부처님이 계시고, 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곳에 가서 신앙생활 잘하세요.” 타종교에 대해 비하하거나 폄훼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모시는 부처님의 온전한 제자로서의 길을 실천하기에만 힘쓰셨던 그분의 종교적 덕목은 모든 종교인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종교적 덕목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선택한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 가르침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지상정의 법칙과 측은지심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은 소위 “하느님 믿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을 닮은” 한 이방인이었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자신이 선택한 종교도 제대로 믿을 수가 있다. “경암 스님, 평안히 잠드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사 시간이 가까워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을 때에 문 앞까지 배웅해 주신 친절한 안내 신도님들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웬지 목탁소리, 자꾸만 나의 발목을 잡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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