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란 무엇인가. 딱히 오스카상을 받아야 명화가 아니다.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지상 최대의 쇼’와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명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같은 영화인데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주는 영화가 명화다. 내겐 이런 영화들이 여러 편 있는데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카사블랑카’ ‘셰인’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The Heiress) ‘짧은 만남’(Brief Encounter) 그리고 ‘도시의 불빛’(City Lights) 등이 그 중 몇 편이다.
이 중에는 내가 지금도 볼 때마다 우는 영화들이 있다. 특히 ‘셰인’은 시작하자마자 울기 시작해 끝날 때 가서는 소리마저 내면서 운다. 난 이 영화를 중학교 1학년 때 서울의 단성사에서 봤는데 그 땐 안 울었다. 그런데 뒤늦게 우는 까닭이 무엇인가. 영화의 쓸쓸한 서정성 탓인가 아니면 영화 속 소년 조이의 깨끗한 동심을 이젠 잃어버린 내 심정의 노쇠가 서러워서인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웨스턴 ‘셰인’(Shaneㆍ1953·사진)은 와이오밍주의 위풍당당한 바위산 그랜드 티튼이 내려다보는 잭슨홀이 무대다. 명장 조지 스티븐스(‘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의 유일한 웨스턴으로 정체불명의 건맨이 외딴 마을에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는 무법자들을 처치하고 떠나간다는 웨스턴의 정형을 따르고 있다.
웨스턴은 미국의 전설로 ‘셰인’은 이 전설의 기본 요소인 신비감에 가득 싸여 있다. 웨스턴은 미국인들이 이상화한 과거로 건맨은 그 과거 속의 신비한 영웅이다. 셰인도 바로 이와 같은 인물로 그는 영웅이 지녀야 할 신비감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독을 찾아다녀야 한다. 스티븐스도 이 영화를 아서 왕 전설 스타일의 미국 얘기로 만들려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신선하도록 쌀쌀한 기운에 젖는 까닭도 반드시 꼭대기에 눈이 덮인 그랜드 티튼의 냉기 때문만이 아니다. 셰인의 자태에서 스며 나오는 이 고독 때문이다.
서부시대와 건맨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1890년대. 새 사회 질서가 더 이상 킬러가 머무를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시대에 총을 놓기로 했던 셰인이 결코 자신이 향유할 수 없는 친절한 타인의 삶을 위해 다시 총을 뽑아 들어야하는 운명은 역설적이요 신비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셰인(앨란 래드)은 한낮에 말을 타고 그랜드 티튼의 등성이를 넘어 나타나는데 이 때 영화 내내 반복되는 빅터 영의 감미로우면서도 비감한 음악이 흐른다. 이 음악은 매우 아름다워 옛날에 한국의 어떤 여가수가 곡에 가사를 붙여 ‘머나 먼 저 산 넘어’라며 노래 부르기도 했다.
과거가 베일에 가려진 건맨 셰인은 아름다운 아내 매리온(진 아서의 생애 마지막 영화)과 호기심 많은 어린 아들 조이(브랜든 디 와일드)와 함께 농장을 운영하는 근면한 조(밴 헤플린)의 집에 객으로 묵는다. 그런데 자기 목장을 확장하려는 목장주 라이커가 자기 농장을 지키려는 조를 처치하기 위해 킬러 윌슨(잭 팰랜스)을 고용하면서 셰인이 조를 위해 대신 윌슨과 대결한다.
오스카상을 탄 수려한 촬영과 함께 인간적인 연기가 훌륭한 이 영화는 잭 쉐이퍼의 소설이 원작이다. 셰인과 매리온의 표현을 억누르는 감정과 조이의 셰인에 대한 영웅숭배 그리고 셰인과 조의 우정 등 솔직하고 사실적인 인간관계가 뚜렷한 여느 웨스턴의 범주를 벗어난 명화다.
특히 그 때까지 ‘연기를 할 줄 모르는 배우’라는 래드의 우수와 사나이의 강인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연기와 검은 모자, 검은 조끼, 검은 부츠에 검은 장갑을 끼고 해골처럼 웃는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팰랜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윌슨을 처치하고 어둠 속의 그랜드 티튼을 향해 떠나가는 셰인의 등에 대고 조이가 “셰인 컴백”하고 외치자 산이 “셰인 컴백”하고 메아리로 대답한다. 총을 놓으려다 팔자소관으로 다시 뽑아든 셰인을 받아주는 것은 자기가 타고 넘어온 산뿐이다. 산과 셰인은 신비한 영역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영화에서 총기 숭배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2차 대전에 종군, 기록영화를 만들면서 총기의 횡포를 목격한 그는 총기란 파괴적이요 폭력적인 도구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오래 전에 당시 조이 또래였던 아들과 함께 잭슨홀을 찾아갔었다. 그랜드 티튼은 멀리서 광활한 잭슨홀 계곡을 검은 잿빛 영혼처럼 압도하고 있었다. 산은 침묵하고 있었는데도 소리를 내며 살아 있었다. 신비하고 운명적이며 엄숙하고 불길하기까지 한 영산이다.
‘셰인’은 세상의 외롭고 폭력적인 것들을 피곤하게 짊어진 서부의 마지막 킬러의 짧은 체류를 순수하고 낭만적인 소년의 눈으로 봐 더욱 감동적이고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조이는 이 총잡이와의 인연을 통해 유년기를 벗어나나 그것은 자기가 숭배하는 영웅과의 이별이라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 나서였다.
‘셰인’은 198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를 기리는 뜻에서 내용이 같은 웨스턴 ‘페일 라이더’(Pale Rider)로 리메이크 했었다. ‘셰인’이 최근 블루-레이로 나왔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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