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워너 브라더스가 당대 최고의 스타 베티 데이비스를 기용해 만든 ‘나우, 보이저’(Now, Voyager·사진)는 1940년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눈시울을 촉촉이 적셔주는 로맨틱 멜로드라마다. 독재적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주눅이든 노처녀가 유부남과의 사랑을 경험하고 자신감이 가득한 아름다운 여인으로 재생하는 ‘미운 오리새끼가 우아한 백조’로 변신하는 얘기다.
어빙 래퍼가 감독한 영화는 여류작가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의 소설이 원작으로 제목은 월트 위트만의 시 ‘풀잎’중 “자, 항해자여 구하고 찾기 위해 돛을 올리세”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 화사한 흑백영화의 주인공은 보스턴 상류층의 폭군적인 어머니(글래디스 쿠퍼) 밑에서 자라 생기가 빠진 혼기를 놓친 샬롯 베일(데이비스). 이런 샬롯을 보다 못한 이 가정의 담당 정신과 의사 자퀴드(클로드 레인즈)가 샬롯에게 남미 행 여객선을 타고 여행할 것을 권유한다.
샬롯은 여객선에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세련되고 멋있는 신사 제리 더랜스(폴 헨리드)를 만나면서 짧은 사랑의 희열에 잠기나 둘은 헤어진다. 제리는 오직 과거의 샬롯처럼 정신적으로 침체해 마음 문을 걸어 잠군 딸 티나 때문에 결혼생활을 지켜나간다.
제리와의 로맨스로 활짝 피어난 백합과같이 된 샬롯은 귀가해 어머니에게 독립을 선언하다. 그리고 샬롯은 마침 자퀴드가 돌보고 있는 티나를 만나 자기 딸처럼 돌본다. 보스턴을 찾아온제리와 샬롯은 재회의 기쁨 속에 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나 결합치 못하고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아름답고 슬프며 또 간절한 여운을 남기는 이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는 ‘여자들의 영화’로 인간조건과 심정의 깊고 후미진 곳을 통찰한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샬롯이 제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는 할리웃이 쓴 가장 아름다운 대사중 하나로 여겨진다. “오, 제리, 우린 달을 원해선 안 되겠지요. 우리에겐 별들이 있으니까요.” 고운 체념의 한숨소리와도 같은 이 대사와 함께 카메라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올라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또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두 개비의 담배’ 장면. 밤의 여객선 갑판에서 제리가 갈망하는 눈동자로 샬롯을 응시하면서 담배 두 개비를 꺼내 함께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제리가 한 개비를 샬롯에게 건네자 샬롯이 이를 입에 무는데 정열이 가득한 두 사람의 접순을 은근하면서도 선정적으로 상징한 장면이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반복되는 이 제스처는 헨리드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여러 영화들이 풍자하고 흉내 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할리웃 초년생인 헨리드는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고 이어 ‘카사블랑카’에서 잉그릿 버그만의 남편으로 나왔다.
래퍼와 데이비스 및 쿠퍼가 각기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맥스 스타이너의 풍요롭게 로맨틱한 음악(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 주제를 차용했다)이 오스카상을 탔다. 서정적이요 아름답고 센티멘털한 음악과 눈부시게 고혹적인 촬영이 작품의 수준을 단순한 소프 오페라에서 한 단계 높이 올려놓은 명작이다.
무엇보다 강렬하고도 민감한 것은 데이비스의 연기다. 데이비스는 그늘진 노처녀로부터 사랑을 깨달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 자존과 독립을 찾고 마침내 치유하고 희생하는 여인의 연기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제작자인 핼 월리스는 처음에 샬롯 역으로 아이린 던과 진저 로저스 및 노마 쉬어러 등을 고려했다. 이에 샬롯 역이 얼마나 실팍한 것인지를 파악한 데이비스가 자신이 전속사인 워너 브라더스의 사장 잭 워너에게 맹렬한 로비를 한 끝에 역을 따냈다.
데이비스는 도톰한 눈두덩 아래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것이 특징으로 그래서 킴 칸스가 ‘베티 데이비스의 눈’이라는 노래를 불러 그 눈을 찬양했다. 나도 그 눈과 이 영화 때문에 데이비스를 좋아하게 됐다.
데이비스는 할리웃 황금기인 1930년대와 40년대 잇달아 히트작을 낸 수퍼 스타였다. 신경과민하고 성질이 불같은 여자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본이 나쁘다고 할리웃의 제왕과도 같은 잭 워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시대를 앞서간 여권운동가의 선봉자이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특히 ‘여자들의 영화’에 강했다. ‘제저벨’ ‘다크 빅토리’ ‘편지’ ‘작은 여우들’ 및 ‘이브의 모든 것’ 등에서 모두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줬는데 그 중에서도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나우, 보이저’다.
빅 스튜디오 시대 ‘스크린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데이비스는 반세기간의 연기생애를 통해 클로드 레인즈와 공연한 ‘데인저러스’와 자기 애인이던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 자기를 빅스타로 만들어준 헨리 폰다와 공연한 ‘제저벨’로 두 차례 오스카 주연상을 탔다.
그리고 ‘미스터 스케핑턴’과 ‘스타’ 등을 합해 모두 여덟 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었다. ‘나우, 보이저’(★★★★★-5개 만점)가 Criterion에 의해 새로 디지털로 복원돼 11월 26일 블루-레이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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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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