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Vexations)이란 제목의 피아노음악이 있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가 1893년에 쓴 곡이다. 악보는 단 한 페이지, 18개 음으로 이루어진 한 줄의 주제와 이에 따른 두 개의 변주가 전부다. 사티는 “이 곡을 깊은 침묵 속에서 진지한 부동자세로 준비한 후 연속해서 840번 연주하라”는 지시어를 악보에 남겼다.
하지만 악보는 한번도 출판되거나 연주되지 않았고, 훗날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가 발견하여 1963년 뉴욕의 한 공연장에서 초연했다. 오후 6시에 시작해 10여명이 돌아가며 정말로 840회를 연주했는데, 다음날 낮 12시 넘어 끝났을 때는 남아있는 청중이 앤디 워홀을 포함하여 열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벡사시옹’은 세계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혼자 또는 집단으로 연주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기이한 에피소드들이 생산되고 있다.
에릭 사티의 음악은 영화나 광고음악으로 자주 사용돼왔기 때문에 그가 정통클래식 작곡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사티의 ‘짐노페디’(Gymnopedie)는 한국에서 시몬스침대의 광고에 사용된 후 수면음악이 되었고, 여러 영화에서 나온 ‘그노시엔느’(Gnossiennes)는 명상음악이나 뉴에이지 음악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넷플릭스 히트작 ‘퀸스 갬빗’에서 주인공의 양어머니가 피아노로 치는 음악이 바로 ‘그노시엔느’이다.
신비하면서도 몽환적 느낌을 주는,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런 피아노음악들을 사티는 커리어 초기에 작곡했다. 이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극음악, 가곡, 합창, 발레곡, 관현악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사후 거의 잊혀졌다.
하지만 전위 예술가들은 사티를 ‘사부님’으로 추앙하고 있다.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플럭서스, 미니멀리즘의 원조가 바로 사티라는 것이다. ‘벡사시옹’을 비롯해 발레곡 ‘퍼레이드’, 교향적 드라마 ‘소크라테스’ ‘가구음악’ 등은 당시 클래식음악의 전통과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 악보자체가 부조리할 정도로 특이했다. 사이렌, 타자기, 권총의 소음을 이용했고, 시각예술과도 같은 그의 악보를 보고 시인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라고 감탄했다.
드뷔시, 라벨, 피카소, 브라크, 장 콕토, 디아길레프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던 사티는 항상 이들보다 한 발 앞서가는 정신적 지주였고, 음악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다간 괴짜이자 기인이고 천재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기행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치며 평생 가난 속에 살았던 그는 똑같은 회색 벨벳정장을 여러벌 갖춰놓고 하나씩 다 낡을 때까지 입고 다녔으며, 늘 검정색 장우산을 들고 다녔으나 정작 비가 오면 우산이 젖을까봐 코트 안에 집어넣고 걸었다. 자신을 수취인으로 한 편지들을 써서 집으로 붙이기도 했고, 1인 종교를 만들어 신자가 되었으며, 점심은 하얀색의 음식만을 먹었다.
작품의 제목이나 악보의 지시어들도 괴상하기 짝이 없다. ‘바짝 마른 배아’ ‘차가운 작품’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상자 속의 잭’(Jack in the Box)같은 제목이 있고, 지시어 중에는 ‘치통 앓는 꾀꼬리처럼’ ‘저녁에 귀가하는 빠르기’ ‘혀를 굴려’ ‘매우 기름지게’ ‘머릿속을 여시오’ 같은 표현이 있는가 하면 ‘친절하고 미소 짓는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라는 조언도 있다.
그의 책 ‘기억상실자의 회고록’에서 사티는 자신의 일상을 이런 식으로 기록했다. “아침 7시18분 기상, 10시23분~11시47분 영감을 얻음, 12시11분 점심식사 시작, 12시14분 식탁에서 일어남, 1시19분~2시53분 내 주변을 건강하게 승마… 오후 10시37분 한쪽 눈만 감고 깊은 취침.”
7월1일은 에릭 사티(1866-1925년)의 100주기였다. 유럽에서는 올 한해 추모행사들이 계속되고 있다. 5월에는 홍콩에서 ‘벡사시옹 피아노 마라톤’이 열렸고, 6월말 영국에서 미공개작품들을 녹음한 디지털 앨범(‘Satie: Discoveries’)도 발매되었다. 사티 전문가들이 수많은 작은 공책들에서 발견한 필사본과 미완성 스케치들을 세심하게 재구성하여 연주한 27곡이 담겼다.
‘벡사시옹’을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나기는커녕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한번 연주에 1분도 채 안 걸리는 반복이 계속되지만, 단조로움이 오히려 자유를 준다. 미니멀의 미학이다. 종결부가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건 조성 선율 화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음표의 바다에서 유영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신비는 이 짧은 음악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는 점. 피아니스트들조차 이 곡을 한참 연주하고 일어나는 순간 이미 잊어버렸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 매혹의 불가사의를 위해 사티는 멜로디를 지우고 자유를 선사했다.
드뷔시는 사티가 “우리 세기에서 길을 잃은 점잖은 중세음악가”라 했고, 사티는 자화상 아래 이렇게 썼다. “나는 아주 늙은 시대에 너무 젊어서 왔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게 너무 많고 복잡하다. 소비와 소유와 정보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점점 가볍고 단순하고 비어있는 삶을 추구하고 싶다. 꽉 찬 유화가 아니라 동양화처럼 투명한 여백이 있는 사티의 음악이 더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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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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