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인도의 극빈주 중 하나인 비하르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무료 급식으로 준 점심을 먹은 뒤 25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입원치료를 받았다(사진). 조사결과 음식이 살충제로 오염된 기름으로 요리된 것이 밝혀졌다.
나는 이 뉴스를 보면서 문득 지난해에 방문했던 인도의 찢어질 듯한 가난이 생각났다.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도의 가난은 가공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가난이 천연덕스럽게 사방에 질펀히 널려 있었다.
도시에는 초호화 호텔과 도시의 구토물의 퇴적층과도 같은 슬럼이 지척지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부와 빈의 격렬한 대조에 몸서리가 쳐졌었다.
인도의 아이들만 오염된 음식을 먹고 죽은 것이 아니다. 내가 서울 한국일보에서 경찰기자를 할 때인 1970년대 후반만 해도 서울에선 식중독 사고가 툭하면 일어나곤 했었다. 인도의 급식 사고를 보고 옛날 생각이 나 묵은 기사 스크랩북을 들춰 보았다.
1977년 9월. 당시 우리도 인도처럼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빵을 줬는데 그 중에 오염된 빵을 먹은 삼양국교 3학년생 정규하군(10)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난 그 때 이 사고를 맡아 정군의 급우들의 추도교실과 영안식 그리고 담임선생님 등을 취재하면서 가난이 정군을 죽였다는 생각에 속으로 울었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성장국이었지만 부정식품과 불량식품이 판을 쳤었다. 이 사고 뒤 문교부는 무상 급식제를 폐지했었다. 졸속행정의 본보기다.
그러나 이 사고보다 내가 아직도 가끔 생각하는 것은 상계동에서 일어난 번데기 식중독 사고다. 1978년 9월 하순이었다. 경찰서를 돌며 야간근무를 하고 있는데 상계동에서 여러 명의 어린 아이들이 오염된 번데기를 사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인근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 왔다.
부리나케 아이들이 있는 청량리 병원과 국립의료원을 찾아 갔더니 5~6세난 아이들이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가쁜 숨들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시 상계동은 헐린 무허가 판잣집 주민들이 밀려와 살던 곳으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막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집 아이들이 동전 몇푼 주고 사먹은 번데기가 농약에 오염된 것이었다.
수사 결과 시골서 화물로 보낸 번데기를 담은 부대가 농약에 오염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10명의 아이들이 숨졌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밤중에 신음하는 아이를 업고 병원 문을 두드렸으나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해 치료가 늦어져 사망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이 싸구려 주전부리로 먹은 번데기로 탈이나 가난한 사람 배척하는 병원 탓에 숨졌다는 생각에 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아이들이 너무 불쌍했다.
나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나는 이 사고에 유난히 매달렸었다. 그래서 국립의료원에서 있은 아이의 사체부검까지 의사 옆에서 지켜봤다. 맨 정신엔 힘들 것 같아 소주를 마신 뒤 부검을 지켜봤는데 마치 냉동 통닭 같은 작고 여윈 아이의 몸에 메스가 가해지는 순간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편집국 부국장이 내게 취재 후일담인 ‘기자의 눈’을 쓰라고 지시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10명의 어린 생명이 갔다. 눈부신 발전도상국에서 일어난 번데기 사고를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였다. 뒤안길은 돌보지 않고 외부 장식에만 급급한 행정당국,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어버린 닥터, 몇 달씩 부대 한 번 빨지 않은 번데기 장수, 사람 하나 잡아넣고 할 일 다 했다는 경찰/중략/입원한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으면서 “경찰기자는 강철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도 잊었는지 나의 눈시울은 붉어지고 있었다./후략’특히 내가 이 사고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 까닭은 당시 사고로 숨진 김주용군(10)의 목공 아버지 김희철씨 때문이다. 그는 고통하는 아들을 업고 밤길을 2시간 반 이상 헤매며 10여군데의 병원 문을 두드렸으나 진료 거부로 주용이는 치료 한 번 못 받고 숨졌다.
어느 날 편집국으로 김씨가 날 찾아와 “그동안 취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술이라도 사 마시라”며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난 감사하면서 이를 사양했는데 후에 그의 소식이 궁금해 언덕의 초라한 집엘 찾아갔었다.
동네 사람들이 “김씨가 매일 같이 아들의 무덤엘 찾아가더니 결국 자살했다”고 알려줬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땅이 꺼지는 것 같은 허무를 느꼈었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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