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한 흑인 트레이본 마틴(17)을 사살한 혐으로 기소된 플로리다의 히스패닉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이 무죄평결을 받으면서 미국은 또 다시 흑백 인종차별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배심원단의 평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에 TV로 사우스LA에 모여든 시위대를 보자니 4.29폭동이 생각나 가슴이 섬뜩해진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평결을 따르자”는 성명을 낼 정도로 민감한 짐머만 재판은 피해자가 흑인이요 가해자가 비흑인이어서 4.29폭동을 유발시킨 로드니 킹 사건 재판 때처럼 전국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었다.
그런데 짐머만 사건은 현재 상영중인 영화 ‘프루트베일 역’(Fruitvale Station)의 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영화는 지난 2009년 새해 첫 날 아침 북가주 오클랜드의 푸르트베일 전철역에서 백인 경찰이 비무장한 흑인 오스카 그랜트(22)를 등 뒤에서 사살한 실제 사건을 그린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 장면을 셀폰 카메라로 찍어 전송,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이때도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이 큰 이슈가 됐었다. 그런데 가해자는 재판을 받고 달랑 8개월의 옥살이 끝에 가석방됐다.
흑인이 대통령이 됐지만 미국에는 여전히 흑백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덴젤 워싱턴을 인터뷰하면서 그에게 “당신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었다. 이에 대해 그는 “그렇다. 그것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사람의 피부 색깔이 서로 다른한 인종차별은 상존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것은 어떻게 보면 생태적인 것이다.
로드니 킹 재판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배심원단의 인종구성을 놓고 말이 많다. 배심원단이 5명의 백인과 1명의 히스패닉으로 구성돼 애당초 비흑인인 피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게 마련이었다는 것이다.
평결 다음 날 한 배심원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배심원들의 짐머만에 대한 유무죄 의견이 반반씩이었으나 결국 무죄평결로 의견이 일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6시간에 걸친 철저한 심의 끝에 내린 결론이라면서 다시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배심원은 당신의 특권이요 막중한 책임이자 훌륭한 시민의 표시’이긴 하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제도는 일반인의 상식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좋은 제도이긴 하나 때론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해야 해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짐머만 재판의 배심원도 말했듯이 배심원들이 처음부터 일치단결해 같은 평결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의 경우 장시간의 토론과 심의 끝에 평결을 내리게 마련이다. 배심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추리나 상상을 하지 않고 증거와 증언에 따라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어 유죄라고 인정되기 전까지는 피고는 무죄다.
이같은 원칙 하에서 절대 다수가 유죄라고 결론 내린 피고에 대한 결정을 한 명의 배심원이 뒤집어엎는 과정을 압도적으로 그린 영화가 ‘12인의 분노한 남자들’(12 Angry Menㆍ1957ㆍ사진)이다. 사실주의 감독 시드니 루멧의 감독 데뷔작으로 헨리 폰다가 주연한 흑백 영화인데 TV극이 원작이다.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베를린 영화제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은 뛰어난 법정드라마다.
폰다 외에도 에드 베이글리, 리 J. 캅, E.G. 마샬, 마틴 발샘, 잭 클럭맨, 잭 워든 및 로버트 웨버 등 기라성 같은 연기파들이 나온다. 이들은 상영시간 96분 거의 내내 배심원실에서 떠나지 않고 격론을 벌여 강한 압박감을 준다.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저녁에 갈 야구경기의 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배심원실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평결을 내린 11명의 유죄 결론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뒤집어놓는 나머지 1명의 양심적인 배심원의 고군분투를 탄탄하고 강력하며 또 긴장감 가득하게 그렸다.
피고는 부친 살해혐의로 기소된 슬럼에 사는 18세난 푸에르토리칸 청년. 재판 후 심리에 들어간 12명의 배심원들 중 11명은 각자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부터 유죄평결을 마음먹으나 8번 배심원(폰다)만은 검찰 측의 증거가 상황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11명에 대해 설득을 시작한다.
8번의 논리와 설득에 따라 나머지 배심원들이 하나씩 차례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꽃 튀는 격론이 스릴마저 느끼게 한다. 각기 개성과 환경과 경험이 다른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평결을 내리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명화로 배심원제에 대한 기소이자 아울러 찬사이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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