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방학에 들어가고 어른들도 휴가를 즐기는 본격적인 여름철이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계절인 여름은 할리웃의 가장 큰 대목으로 스튜디오 연 총수입의 40%가 이 때 들어온다. 따라서 스튜디오들은 이 때 10대와 젊은 성인들을 노린 블록버스터들을 줄줄이 내놓는다.
할리웃의 여름은 5월 첫 주말부터 방학이 끝나는 9월 첫 주말까지로 이 때 나오는 스튜디오 영화들은 대부분 현재 상영 중인 ‘분노의 질주 6’ 같은 무지막지한 액션영화거나 ‘행오버 3’ 같은 해괴망측한 코미디들. 아무 생각 없이 팝콘 먹고 소다 마시면서 보는 팝콘영화들이다.
그러나 제목에 서머 자가 붙은 좋은 영화들도 많다. 내가 추천하는 이들 서머 무비는 거의 다 소품이거나 외국 영화들이다.
서머 무비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피서지에서 생긴 일’(A Summer Place·1959·사진)이다. 델머 데이브스가 감독하고 둘 다 새파랗게 젊고 예쁘게 생긴 트로이 도나휴와 샌드라 디가 나오는 미 동부 해안 피서지에서 일어나는 틴에이저들의 사랑의 얘기다.
나는 이 영화를 고교생 때 조선호텔 앞에 있던 2류관 경남극장에서 봤는데 맥스 스타이너가 작곡한 아름다운 주제곡(퍼시 페이스 경음악단의 연주로 유명하다)과 시원한 여름 바다 그리고 도나휴와 디의 소꿉장난과도 같은 로맨스에 혹하고 빠졌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 야수지로 오주의 ‘맥추’(Early Summer·1951)는 사실 계절과는 무관한 오주 특유의 가족 드라마다. 직장 여성인 28세난 딸 노리코(오주의 단골배우 세추코 하라)의 과년한 딸의 결혼 걱정을 하는 아버지(오주의 단골배우 치슈 류)를 비롯한 가족의 얘기로 참으로 고요하고 사려 있으며 은근한 감수성을 지닌 작품이다.
여인들의 하얀 반팔 블라우스와 매미소리 그리고 햇볕 맞으며 조는 듯한 오후의 정원과 빨랫줄에 걸린 속옷에서 느껴지는 여름의 감촉이 시원하다. 이 영화는 제목에 계절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오주의 ‘만춘’과 ‘도쿄 이야기’와 함께 3부작으로 짜여진 ‘노리코 이야기’ 중 두 번째 것이다.
오주처럼 제목에 계절 이름 잘 붙이는 프랑스 감독 에릭 로머의 ‘클레어의 무릎’(Claire’s Knee·1971)과 ‘해변의 폴린’(Pauline at the Beach·1983) 그리고 ‘여름’(Summer·1986)은 모두 여름에 보면 잘 어울릴 영화들이다. 소녀 클레어의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갓 익은 듯한 무릎과 수영복을 입은 해변의 15세난 폴린 그리고 텅 빈 여름 파리에 혼자 남았다가 영화 마지막에 가서 황혼에 황홀한 초록색 섬광을 목격하면서 자아를 찾는 델핀의 이야기들이 담담하니 좋다. 오주 영화들을 생각나게 하는 연출로 신선하고 아름답고 깊이가 있다.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의사 지바고’ 등을 만든 데이빗 린의 소품 ‘여정’(Summertime·1955)은 여름 베니스에서 잠깐 맺어지는 미국인 노처녀 초등학교 선생(캐서린 헵번)과 이탈리안 유부남(로사노 브라지)의 못 이룰 사랑의 이야기. 부식해가는 물의 도시 베니스의 경치와 헵번의 간절한 연기 그리고 센티멘털하고 감미로운 음악 등 이 모두 좋은 주옥같은 사랑의 영화다.
스웨덴 감독 잉그마르 베리만의 흑백촬영이 눈이 따갑도록 강렬한 ‘모니카와의 여름’(Summer with Monica·1953)은 두 젊은 남녀의 몸으로 불태우는 정열이 계절 못지않게 화끈한 러브 스토리다. 나체와 분방한 성적 내용과 묘사로 논란이 일었던 작품으로 주연 여우 해리엣 앤더슨은 촬영 당시 베리만의 애인이었고 그 뒤로도 그의 여러 작품에 나왔다.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세야스의 ‘여름 시간’(Simmer Hours·2008)은 줄리엣 비노쉬와 샤를르 베르링 등 앙상블 캐스트의 조화가 보기 좋은 가족 드라마다. 사망한 어머니의 집과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뿔뿔이 헤어졌던 가족이 여름에 한데 모이면서 묘사되는 변화하는 가족의 얼굴에 관한 사실적이요 민감한 영화다.
나의 ‘길티 플레저’ 영화 중 하나가 ‘서머타임 킬러’(Summertime Killer·1973)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합작으로 아버지의 살해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아들(로버트 미첨의 아들 크리스토퍼 미첨)의 멜로드라마다. 아들의 연인으로 프랑코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으로 나온 올리비아 허시가 나온다.
현재 상영 중인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은 진짜 어른들을 위한 소품 서머 무비다. 리처드 링크레이터가 감독한 ‘제시와 셀린’ 3부작 중 세 번째 영화로 그리스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제시(이산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이 걷고 얘기하고 다투는 ‘워킹 앤 토킹’ 영화다. 오랜 관계의 희로애락을 탐색한 매력적인 명품이다. 해피 서머!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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