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970년대 중반 서울의 한국일보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을 때 한국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칠레는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 하에 있었다. 당시 우리 외신부 기자들은 타임 등 잡지와 외신을 통해 피노체트의 철권 압제통치의 실상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한국과 닮았을까 하며 쓴 웃음을 짓곤 했다.
칠레 시민이 버스에서 피노체트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가 그 즉시 정보부에 끌려갔다는 타임 기사를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에서도 막걸리 집에서 술에 취해 박정희를 비판하는 소리를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한국 중앙정보부(KCIA)가 있는 남산으로 끌려갔었다.
그런데 과거 이 두 나라의 독재정치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혈연들이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돼 뉴스에 자주 오르고 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미 CIA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에 항복하지 않고 자살한 칠레의 민선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질녀 이사벨 아옌데(70·사진)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나는 지난 15일 샌타모니카의 브로드 스테이지(1310 11th St.)에서 공연된 오페라 ‘상냥한 로사’(Dulce Rosa)에서 이사벨을 봤다. 이사벨은 공연 전 자기 단편소설 ‘복수’가 원작인 이 오페라에 관해 KUSC 라디오 오페라 해설가인 더프 머피와 대담을 했다.
난 기자 출신의 작고 당차고 생기발랄한 이사벨을 보자 문득 과거 서울의 외신기자 시절이 생각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아이러니 속에 휘말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사벨은 사랑과 섹스, 정치와 콩고의 내전 및 자기 작품과 이 날 지휘자인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첫 만남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말했는데 매우 직선적이요 솔직하면서도 위트와 유머가 풍부했다.
그런데 때로 이사벨의 유머는 도전적이다시피 냉소적이어서 혹시 피노체트 정권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은 그녀의 어두운 과거 탓은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짐작해 봤다.
이사벨의 대표작은 ‘영혼의 집’으로 이 책은 1993년 제레미 아이언스, 메릴 스트립, 글렌 클로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위노나 라이더 및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 초호화 캐스트의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영화는 비평가들과 관객들로부터 모두 냉대를 받았는데 이사벨도 “그 영화 졸작”이라고 말해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사벨은 이어 자기 작품을 연극이나 영화 또는 오페라로 만들 때 자신은 개입을 않고 만드는 사람에게 맡긴다고 말했다.
“러브신을 쓸 때 음악을 듣느냐”는 질문에 이사벨은 “헐떡이는 숨소릴 듣는다”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면서 “내가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아직 어머니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사벨은 이어 라틴문학에 ‘마법적 사실주의’의 낙인이 찍힌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 “삶과 세계는 우리가 채 다 이해하고 다루기엔 신비한 것이어서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이를 받아들이도록 애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혼의 집’은 이사벨이 1981년 1월8일 병든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바탕이 돼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그 뒤로 이사벨은 모든 글을 이 날부터 쓰기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구식 컴퓨터로 글을 쓴다는 이사벨은 무엇으로 쓰든지 간에 필요한 것은 이야기라면서 특별히 자신을 대표하는 책이나 인물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사벨은 늘 자신이 읽고 보면서 감동하는 글을 쓰고 싶다며 대담을 마쳤다. 이사벨은 역시 작가인 미국인 남편 윌리 고든과 함께 북가주 베이 에리어에 살고 있다.
2막짜리 오페라 ‘상냥한 로사’는 1950년대 남미의 한 국가를 무대로 일어나는 내전과 폭력과 음모 그리고 사랑과 복수와 궁극적 구제에 관한 비극적 멜로드라마다. 기득권 정치세력과 이에 도전하는 게릴라 간의 정치적 드라마이기도 하나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
은퇴한 상원의원 안셀모(테너 그렉 페덜리)와 그의 딸 로사(우루과이 태생의 소프라노 마리아 안투네스가 강렬하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노래한다) 그리고 안셀모를 살해하고 로사를 겁탈한 게릴라 지도자 타데오(바리톤 알프레도 다사)가 주인공. 로사는 타데오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나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오페라는 비극으로 끝난다. 희랍 비극적인데 이사벨은 로사를 생각했는지 대담에서 “‘토스카’와 ‘아이다’처럼 대부분 오페라의 주인공들은 여자”라고 강조했다.
작곡가는 ‘스플래쉬’와 ‘올드 그링고’ 등 영화와 TV 시리즈 ‘문라이팅’의 음악을 작곡한 리 홀드리지. 이런 배경 탓인지 작품이 오페라라기보다는 대중적인 뮤지컬풍이다. 멜로디가 다양하고 곱고 금방 친근감이 가나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이름다운 것은 비디오 프로젝션에 의한 배경. 대본과 연출은 리처드 스팍스로 보고 즐길 만한 오페라다.
‘상냥한 로사’는 다운타운 그랜드 애비뉴의 LA 오페라 본부인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을 떠나 공연하는 ‘오프 그랜드’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세계 초연이다. 6월3일과 6일(오후 7시30분) 및 9일(오후 4시) 세 차례 공연이 남았다. (310-434-3200)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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