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때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뉴욕대에 다니다가 방향을 틀어 지금은 목사가 된 아들과 영화 얘기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니”하고 묻자 아들은 “로베르 브레송, 야수지로 오주 그리고 하워드 혹스야”라고 대답했다.
난 이 대답에 아들이 뉴욕에 갈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때 아들은 “난 브레송 같은 작품을 만들 거야”라고 말했는데 난 이 말을 들으면서 “야, 너 고생께나 하겠구나”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었다.
누벨 바그를 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위대한 감독 브레송이 생애 50년간 단 13편의 영화를 만든 것은 그가 작품 선택이 까다로운 탓도 있지만 그의 영화들이 너무나 영적이어서 흥행성이 없어 제작비 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브레송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생 때 서울의 을지극장에서 본 ‘소매치기’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바탕으로 만든 영혼의 혼란과 죄와 벌과 궁극적 구제에 관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자신은 나머지 인간들의 도덕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 젊은 소매치기 미셸이 행하는 소매치기 장면은 눈알이 돌아가는 황홀한 묘기로 장 콕토는 이를 ‘도둑질의 발레’라고 찬양했다.
나로 하여금 영화가 예술적 차원을 너머 철학과 종교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영화도 브레송의 ‘시골신부의 일기’였다. 자신을 ‘기독교도 무신론자’라 부른 브레송의 진실 탐구의 뜻과 궁핍할 정도로 단순한 스타일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시골의 젊은 가톨릭 신부가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그들의 영혼 구제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은총에 이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과정을 그린 영화로 브레송의 깊은 신앙심이 느껴진다.
장-뤽 고다르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소설이며 모차르트는 독일의 음악이듯이 로베르 브레송은 프랑스의 영화”라고 말한 브레송은 카메라의 철학자요 영적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혹독하게 엄격하고 절제됐으며 우아하다. 내용과 스타일이 너무나 순수하고 심오해 근접하기도 또 흡수하기도 그렇게 쉽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들을 구도자의 심정으로 보노라면 뜨거운 정열과 영혼의 명징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품에서 자유의지와 운명 그리고 고통과 구제를 모색하면서 영혼과 육체적 고립 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들을 위해 은총과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가혹한 세상 속의 존재의 가치에 대한 물음들로 가득하다.
브레송은 주제와 아이디어는 다양했지만 스타일은 꾸준히 일관성을 지켰다. 그는 일종의 테크니션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의 정수를 포착하기 위해 장면을 빈틈없이 구성, 영상미를 배제하고 주도면밀히 장면과 장면 간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의 화면은 삭막할 정도로 편평하고 단조로운데 여백의 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치밀한 시계태엽처럼 엄격한 테크닉을 사용해 거추장스런 것들을 철저히 제거,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검소하다. 그의 영화는 수필처럼 단정하고 간결하다.
특히 그는 단순한 사물과 행동 그리고 세밀한 것에 집착하면서 스펙터클과 멜로드라마 그리고 감상성과 플롯을 무시했다. 네오 리얼리스트들처럼 비배우를 즐겨 쓰고 자연음을 자주 썼다. 브레송이 비배우를 고용하고 자연음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 ‘모든 탈주영화 중 최고의 것’이라 불리는 ‘남자 탈출하다’(A Man Escaped·1956·사진)이다.
브레송이 2차 대전 중 나치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투옥됐던 경험과 함께 리용의 몽뤽 교도소에서 탈출한 프랑스 장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스릴러이자 영혼과 인간성 그리고 치열한 자유 추구를 그린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주인공 퐁텐(소르본대 철학도 프랑솨 레테리에)의 안전핀과 침대 스프링과 시트 그리고 숟가락과 베갯속 말총 등 온갖 물건들을 이용한 집요하고 끈기 있고 또 주도면밀한 탈출 준비과정과 실천을 긴장감 가득하고 단단히 조여 가며 묘사해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다.
대부분 교도소 내부가 무대로 레테리에의 무감한 내레이션과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마치 기록영화를 보는 것 같은데 장면 밖에서 들려오는 군화소리와 기적소리 그리고 총격소리 등 실제 음을 사용, 작품의 사실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정확한 화면 구성과 여백의 활용 그리고 반복 촬영과 흐름의 리듬 및 카메라의 각도 등 브레송의 테크닉이 절정을 이룬 투명한 영화로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와 블루-레이로 나왔다.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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