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얼마 전 세 번째 핵실험에 성공, 이제 북한은 명실 공히 핵보유국이 됐다. 핵은 바그너의 라인골트처럼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말 텐데도 국가들은 핵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과거를 배울 줄 모르는 우둔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핵에 관한 좋은 영화들로는 쇼헤이 이마무라 감독의 ‘검은 비’와 스탠리 쿠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및 ‘그 다음 날’(TV 미니시리즈)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영화들보다도 아름답고 심오하며 시적 상심을 느끼게 하는 영화는 프랑스의 알랭 르네 감독의 ‘히로시마 몬 아무르’(Hiroshima Mon Amour·1959·사진)이다.
영화를 보면서 핵의 파괴성과 적의에 거의 자포자기와도 같은 허무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그 내용이 핵 투하의 암울하고 긴 잔영을 사랑의 수용 불가능성과 상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망각성과 기억의 아픔을 히로시마의 고통과 원폭투하 불과 14년만에 서서히 잊혀가는 기억의 상실과 접목시킨 러브 스토리이자 반전영화다.
사랑과 죽음, 기억과 망각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얘기가 거의 초현실적 분위기에서 두 남녀의 대사와 클로스 업 되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표정으로 서술되는데 프랑스의 여류작가 마게리트 뒤라스가 쓴 각본은 구구절절이 시다. 대사가 이렇게 아름답고 육감적이며 또 상징적인 영화도 찾아보기 드물다.
히로시마라는 범세계적 파멸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하루 남짓한 사랑의 이야기(일본어 제목은 ‘24시간의 정사’)는 호텔 뉴히로시마 118호실에서 두 남녀가 벗은 상반신을 서로 꽉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어 나신 위에 내려앉은 핵진이 서서히 정사로 촉진된 땀방울로 변하는데 이들의 이런 모습은 포옹한 채 핵을 맞아 응고된 두 연인을 연상케 한다.
여자를 끌어안은 남자(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없다)는 단조로운 톤으로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았소”라는 독백을 계속한다. 히로시마의 공포와 아픔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여자(에마뉘엘 리바)는 히로시마에 평화에 관한 영화를 찍으러 온 파리지엔 배우요 남자(에이지 오카다)는 건축가. 내일이면 떠나야 할 여자는 2차 대전 때 고향 느베르에서 겪은 점령군 독일 병사와의 쓰라린 첫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살육의 장소인 히로시마에서 또 다른 외국인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검은 신사복 차림의 남자로부터 첫 사랑의 기억과 함께 청춘의 열기를 물려받아 불덩이가 되면서 “당신의 몸은 마치 장갑처럼 내게 맞는다”고 육감을 찬미한다. 여자는 이어 “날 탐식하세요” “날 당신 좋을 대로 뒤틀어 버리세요”라고 호소하면서 “1주일만 아니 사흘만 더 있어 달라”는 남자와의 이별을 아파한다. 여자의 고뇌의 표정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차 없이 유린하는데 얘기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여자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르네 감독은 두 사람의 급박한 이별 앞에서의 사랑과 함께 히로시마의 원폭기념관 내의 전시물과 피해자 추모제 등을 보여주면서 기억과 망각의 피폭자인 여자와 핵의 피폭지인 히로시마의 동질성을 과묵하게 연결해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는 밤새도록 인적이 끊긴 바와 식당의 네온만이 명멸하는 히로시마 거리를 마치 이별을 연장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천천히 걷는다. 둘의 보조에 맞춰 따라가는 카메라의 걸음과 흑백촬영이 검소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둘은 강가의 다방에 들른다. 여기서 여자는 남자가 건네주는 사포로 맥주를 거푸 마시면서(리바는 인터뷰에서 진짜로 맥주를 마셔 취했다고 한다) 남자에게 자신의 적과의 사랑과 애인의 죽음 그리고 이 사랑 때문에 받은 치욕적인 처벌을 고백한다(플래시백으로 묘사된다). 두 사람은 다 기혼자이나 르네는 이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여자는 “남겠다”고까지 말하나 리바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가정이 있는 여자가 남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남는다면 천박한 얘기가 됐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둘이 들른 카페는 ‘카사블랑카’. 이어 호텔로 돌아온 여자를 뒤쫓아 남자가 방문을 두드린다. “올 수밖에 없었다”는 남자는 여자의 두 팔을 아프도록 붙잡고 “내 이름은 히로시마, 당신 이름은 느베르”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사랑의 교착상태로 끝난다.
에마뉘엘 리바는 오는 24일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무르’로 여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이 날로 86세가 된다. 참 아름답게 늙었다.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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