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부터 7일까지 프레스정킷 차 뉴욕엘 다녀왔다. 쌀쌀한 날씨의 맨해턴은 할러데이 시즌의 약간 들뜬 분위기를 털목도리처럼 몸에 감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정취는 아무래도 LA보다는 뉴욕이라야 제 멋이 난다. 인파로 북새질을 치는 록펠러센터 앞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꽃전구들과 티파니 보석상을 장식한 빨간 리번을 단 미슬토우를 구경하자니 조금 사치한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다.
뉴욕에서 본 영화들은 ‘레미제라블’과 ‘호빗’과 ‘쟁고 언체인드’ 및 ‘퍼렌탈 가이던스’ 등 모두 4편. 인터뷰한 배우들은 러셀 크로우, 휴 잭맨, 앤 해사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이미 팍스, 빌리 크리스탈, 베트 미들러 및 이안 매켈런 등 모두 17명. 인터뷰한 감독들은 캐서린 비글로, 피터 잭슨 및 퀜틴 타란티노 그리고 탐 후퍼 등 모두 4명.
그러나 내가 이번에 뉴욕에 간 가장 큰 이유는 알 파치노(72)가 나오는 연극 ‘글렌개리 글렌 로스’(Glengarry Glen Ross)를 보기 위해서였다. 브로드웨이의 제럴드 션펠드 극장은 만석이었다. 모두들 나처럼 파치노를 보러온 것이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제일 비싼 좌석이 377달러요 파치노는 1주에 12만여달러를 받는 파격적 대우를 받고 있다.
데이빗 매멧의 1984년도 퓰리처 수상작인 연극은 시카고의 ‘죽어가는 부류’인 4명의 날사기꾼 부동산 세일즈맨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다룬 실존적 연극이다. F자와 S자 상소리로 시작하고 끝난다고 해도 될 만큼 주인공들이 마치 침을 뱉듯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는 거칠고 야한 작품으로 탐욕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대사가 기관총 쏘듯 빠르고 치명적인 연극으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바닥 인생들의 잔인한 현실을 코믹하면서도 비감하고 또 가차 없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연극은 지난 1992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파치노는 여기에도 나와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그런데 영화에는 본부에서 일선 사무소로 파견된 세일즈 독려원으로 나오는 알렉 볼드윈(이 역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이 한 세일즈맨에게 ‘헌다이’를 들먹이며 모욕을 주는 장면이 있다.
볼드윈은 이 세일즈맨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등신이라고 다그치면서 “넌 헌다이를 타고 출근했지만 난 8만달러짜리 BMW를 타고 왔어. 이 X팔새끼야”라고 욕설을 해댄다. 당시 이 말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던 내 심기가 매우 불편했었는데 마침내 내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 왔다. 몇 년 전 볼드윈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난 그에게 “당신 ‘글렌개리 글렌 로스’에서 헌다이를 비방했는데 이젠 헌다이가 많이 좋아졌으니 혹시 세컨드 카로 살 용의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볼드윈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깔깔대고 웃으면서 “이거 뭐야. 당신 헌다이 주식이라도 갖고 있어. 난 각본에 있는 대로 말했을 뿐이야”라고 대들었다.
나는 이에 “어쨌든 당신이 말 했잖아”라고 다그쳤더니 볼드윈은 그제야 “알았어. 알았어. 헌다이 살게”라며 항복을 했다. 그 후 과연 그가 헌다이를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 때 애국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세일즈맨들의 얘기인데다가 욕설이 난무해 ‘F… 킹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연극에서 파치노는 병든 딸을 가진 완전히 한물 간 왕년의 수퍼 세일즈맨 쉘비 레빈(영화에서는 잭 레몬)으로 나온다. 파치노는 어떻게 해서든지 건수를 올리려고 절망적으로 안간힘을 쓰는 쉘리의 모습을 교활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아울러 측은하고 무상하게 표현했다.
힘이 다 빠진 채 비틀대다가 돌연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순 사기꾼의 허튼소리와 자기도취에 빠져 왕년의 자랑을 늘어놓고 독백하다가 후렴 식으로 상소리를 섞어 아첨하고 음모하고 또 을러대면서 건수를 채우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허술한 듯 하면서도 강인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만큼 가슴 찡한 연기는 아니다. 파치노가 무대에 나오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기대에는 못 미친 연극에서 화끈한 것은 영화에서 파치노가 한 의기양양하고 간사하며 위협적인 리처드 로마 역을 한 바비 캐나베일(사진 오른쪽, 왼쪽이 파치노). 기름이 잘잘 흐르는 올백 머리에 야한 셔츠 위에 말쑥한 정장을 한 캐나베일이 욕지거리와 위협과 간교한 속임수의 말을 뱀의 혀처럼 놀려대면서 거의 과장됐으리만큼 질풍노도와 같이 무대를 휩쓸어 보는 사람을 겁나게 만든다.
연극이 끝난 뒤 퀸스보로 브리지 바로 옆에서 열린 ‘호빗’ 프리미어 파티에 참석했다. 포도주를 몇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파란 전등으로 치장한 퀸스보로 브리지를 돌아다보니 우디 앨런의 새벽안개에 감싸인 ‘맨해턴’이 생각났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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