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사진)라는 영화를 봤다. 박범신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70대의 시인 이적요가 17세난 여고생 은교를 사랑하게 되면서 가슴 속으로 겪는 기쁨과 아픔, 부질없는 희망과 슬픔 그리고 욕망과 체념을 아름답고 담담하게 그린 드라마다.
현격하게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 간의 사랑을 고깝게 보는 사회의 고정관념에 대한 반박과도 같은 작품에서 시인은 은교를 처음에 이렇게 만난다.
은교는 한 여름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의자에 앉아 백색 러닝셔츠 아래로 하얗고 탐스런 허벅지와 종아리를 드러낸 채 땀에 젖어 깊은 오수에 빠져 있었다. 티 묻지 않은 선정성이 땀구멍마다 가득한 은교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노시인의 눈에 동경이 당황하며 머뭇거린다.
시인이 은교를 처음으로 목격하는 이 모습은 블라디미르 나보코브의 동명소설을 원전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롤리타’에서 40대난 문학교수 험버트(제임스 메이슨)가 성적으로 조숙하고 백치미를 지닌 12세의 롤리타(수 라이언)를 처음 목격하는 모습을 닮았다.
험버트는 셋방을 찾아 롤리타(본명은 돌로레스로 롤리타는 험버트가 지어준 별명)의 집에 들렀다가 뜨거운 한 여름 비키니 차림으로 뒷 잔디마당에 엎드려 롤리팝을 빨아먹고 있는 롤리타를 보고 완전히 이 소녀에게 빠지고 만다. 이적요와 험버트는 모두 자신들의 소녀들과의 이 첫 대면으로 인해 메이-디셈버 로맨스의 고된 홍역을 치르게 된다.
‘은교’는 시인의 제자가 제3자로 등장하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발생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약간 스릴러 티를 내는데 모든 메이-디셈버 로맨스가 다 그렇듯이 애처롭게 끝이 난다.
영화에서 시인의 제자는 스승의 은교에 대한 숨은 사랑을 발견하면서 스승을 추하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내가 딱히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나는 제자의 이같은 비난이 영 마음에 안 든다. 70대가 10대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추하고 불결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은 통풍이 안 되는 통념에 지나지는 않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마음을 추하다고 비난하기엔 그의 은교에 대한 그리움이 소년처럼 순진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은교’라는 제목의 글에서 소녀를 이렇게 적는다.
‘발목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뒤꿈치가 이내 손가락 속으로 쏙 들어왔고 그녀가 킥킥 웃었다. 턱 밑으로 들어오는 은교의 머리칼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고 내 입술이 벌써 그 아이의 머리카락 속을 헤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입에서 쇄쇄 풀무소리가 났다.’
한편 험버트는 롤리타를 이렇게 찬양한다.‘롤리타, 내 생의 빛, 내 허리의 불길, 나의 죄악, 나의 영혼’이라고. 이적요와 험버트의 자신들의 사랑에 대한 묘사는 서로 이렇게 다르긴 하지만 절실하긴 마찬가지다.
‘은교’와 ‘롤리타’는 각기 나이 먹은 남자가 10대 소녀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은 갖고 있지만 그 사랑의 현실은 아주 다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도망 다니다시피 하면서 함께 살지만 이적요는 은교를 가슴과 글로서만 사랑한다. ‘롤리타’가 중년 남자의 10대 소녀에 대한 성적 집착을 원초적으로 그렸다면 ‘은교’는 그것을 보다 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노인들의 사랑과 섹스를 추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우선 그들의 육체적 아름다움의 고갈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로맨스 그레이’라는 말도 있듯이 노인들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한다는 사실은 조사에 의해서도 여러 번 밝혀진 바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몸이 늙으면 마음과 정열도 함께 늙는 줄 알았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줄 알았다. 사랑과 섹스를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념도 바로 나의 이런 착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는 10일에 개봉되는 로맨스 코미디 ‘호프 스프링스’에서도 메릴 스트립은 몇 년째 섹스를 마다하는 남편 타미 리 존스를 견디다 못해 남편을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해 결혼문제 상담소를 찾아간다. 젊은이들이 보면 또 추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에겐 아주 현실적인 얘기여서 깔깔대고 웃으며 즐겼다.
인간의 젊음에 대한 집착은 어찌 보면 영생에 대한 욕망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겠다.
청춘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일진대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을 나무랄 수야 없겠다.
과연 메이-디셈버 로맨스는 자신의 늙음을 타인의 젊음으로 대속하려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가.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사람의 마음의 행위에 섣불리 주홍글씨를 붙이기를 주저할 수 있는 관대함이 아쉽다. 노인은 사랑도 못하는가.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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