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절대 혼돈이었다. 태초의 카오스가 거기 있었다. 이미지와 색깔과 냄새, 경적과 소음과 먼지와 오물 그리고 쓰레기와 오염과 에너지가 아비규환을 이루며 내 영육의 감관을 무참히 유린했다. 그 무질서와 혼돈은 차라리 경탄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인도는 가난이 천연덕스럽게 사방에 질펀히 널려 있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이런 가난과 혼돈과 무질서를 체념을 넘어 마치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더불어 살고 있었다. 태양이 느낌의 흔적을 지워버린 듯한 인도 사람들의 무표정에서 난 부처의 얼굴을 읽었다.
지난달 하순부터 이 달 초까지 열흘 정도 자이푸르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참석차 인도엘 다녀왔다. 7개의 문으로 둘러싸인 자이푸르의 별명은 ‘핑크시티’. 지난 1876년 영국의 왕세자가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 도시의 대로변 집들을 핑크색으로 칠해 나온 이름이다.
핑크색이라기보다 퇴색한 벽돌 색깔의 도시는 자동차, 릭쇼, 오토 릭쇼, 오토바이, 트랙터, 손수레와 마차 그리고 사람, 코끼리, 원숭이, 낙타, 개, 돼지, 당나귀, 염소, 말과 함께 인도 에 만유하는 소들이 한데 섞여 마치 노아의 홍수에 세상의 온갖 생명체와 잡동사니들이 떠내려가듯 밀려다니고 있었다. 가공스런 공존이다.
독일인 친구 엘마와 나를 인도해 준 현명하고 유머가 있는 택시운전사 샤르마가 자주 되 뇌이듯 과연 “인크레더블 인디아”였다. 그 대혼잡의 진앙지에서 내가 느낀 충격은 가히 초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혼돈과 무질서는 나름대로 속으로 조화와 질서를 안고 있었다. 도시 풍경은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마구 뿌려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한 초현실주의 작품과도 같았다.
미국서 떠난 비행기는 먼저 뭄바이에 도착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현장인 뭄바이는 초호화 호텔과 슬럼이 지척지간에서 공존했다. 관광지가 된 도심의 대형 빨래터 (사진)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부와 빈의 격렬한 대조에 몸서리가 쳐졌다.
정말로 사람도 많다. 인도가 인구가 과포화 상태라는 것은 길바닥을 메운 인파에서 뿐 아니라 뭄바이의 작은 생선요리 집에서 테이블 수만큼이나 매니저와 웨이터가 많다는 것을 보고 절실히 깨달았다.
자이푸르에서 묵은 방에 두꺼비 자물쇠가 달린 150년 묵은 옛 귀족 별장 호텔 나일라 바그 팰리스(Naila Bagh Palace)의 친절하고 유능한 매니저 라지(Raj)가 마련해 준 택시로 앰버포트를 찾아갔다. 산꼭대기의 거대한 요새가 위풍당당한데 등에 관광객을 태운 페디큐어에 얼굴에 울긋불긋 화장을 한 코끼리의 인고를 받아들이는 걸음에서 시지포스의 고뇌를 봤다. 데이빗 린의 마지막 영화 ‘인도로 가는 길’이 생각났다. 여기서 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자이푸르에서 다음 기착지인 아그라로 가던 중 목격한 거대한 원숭이신 동상 앞에서 신을 벗고 합장하는 남자는 과연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도중에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세우자 샤르마가 우리 둘의 팔짱을 끼고 차가 질주하는 길을 마치 적진 돌파하듯 건너면서 “인도에서 길을 건너기는 예술이지요”라며 웃는다. 인도의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인듯 하다.
아직도 사람을 지붕 위에 싣고 달리는 기차를 보면서 느낀 오금이 저려오는 전율감은 아그라에서 본 타지마헬(인도 사람 발음) 앞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여성적이요 거룩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었다. 숨을 멈추게 하는 이런 호사와 아름다움은 무덤을 나오자마자 다시 만나는 빈곤으로 인해 나의 생각과 느낌을 어지럽게 했다.
도시 변두리 슬럼에 들어서자 웃통을 벗어젖힌 꼬마 녀석 둘이 근육미를 재며 “할로, 모니, 초컬릿” 하며 카메라 포즈를 취한다. 인도의 거장 사티아짓 레이의 ‘아푸 3부작’의 주인공 소년 아푸가 눈앞에 떠올랐다. 거지와 구걸, 가난과 누추함과 맨땅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들이 6.25시절 내 과거를 생각나게 해 속살에 통증이 오면서 서둘러 집에 가고픈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차를 타고 관광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마저 느꼈다.
인도의 뒷덜미를 보려고 시골 몇 군데를 들렀다. 먼지 바닥에 주저앉아 무료를 반추하고 있는 소들(소팔자 상팔자다)의 모습이 장바닥에 세월을 깔고 쭈그리고 앉은 터번을 쓴 노인들의 해탈처럼 보인다. 모두들 아직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하는 것 같았다.
수레 위의 과일을 덮어쓴 먼지는 마지막 기착지인 델리를 회색 면사포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에 천식과 호흡기 질환 병원이 곳곳에 눈에 띈다. 델리에서 간디의 무덤을 방문했다.
델리로 떠나기 전 날 마투라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다. 화학 폐기물로 새카만 야무나강에 보트를 타고 마을 뒷모습의 부식미를 완상했다. 썩고 무너져 내리는 것의 아름다움이 고전 같다. 교통순경이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하는 이 동네의 극치에 달한 교통혼잡과 무질서를 보고 깔깔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도에 머무는 동안 단 한 건의 교통사고도 보지 못했다. 이것이야 말로 또 하나의 예술이다. 압도적인 경험에 몸과 마음이 모두 곤죽이 된채 인도를 떠나면서 왜 싯다르타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났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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