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마치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날 나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두 동료 일본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코와 유키는 모두 도쿄에 가족이 있어 그들의 안부를 물었더니 다행히 다들 안전하다며 고국이 걱정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원전이 파괴되면서 세계에서 유일한 핵폭탄 피해국가인 일본은 지금 죽음의 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방사능 낙진의 공포는 캘리포니아에까지 파급돼 당국의 불필요하며 인체에 유해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오염 방지제가 동이 났다고 한다.
이번 대재난을 보면서 새삼 절감한 것은 인간은 자연의 위력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며 또 우리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에 의해 파괴되는 역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핵은 이와 해의 양날을 지닌 칼이다. 특히 핵의 파괴력은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는 가공한 것인데도 북한의 김정일을 비롯해 세계는 핵군비에 혈안이 돼 있다. 지금 우리는 핵우산 아래 살고 있는데도 마치 그것을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다.
일본의 방사능 낙진 뉴스를 보면서 머리에 떠오른 것이 핵의 무책임을 경고한 흑백영화 ‘그 날이 오면’(On the Beach·1959)이다. 메시지 감독 스탠리 크레이머(‘흑과 백’ ‘초대 받지 않은 손님’)가 만든 이 영화는 다소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이긴 하지만 핵의 생명 파괴력을 통렬하게 보여준 좋은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고교생 때 명동극장에서 봤는데 그 때 경험한 충격적이요 슬픈 감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64년. 제3차 세계대전 후. 지구의 북반구는 핵에 의해 완전히 인구가 멸살됐고 죽음의 재가 서서히 남반구 쪽으로 이동 중이다. 아직도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호주. 그러나 호주도 앞으로 반년 후면 죽음의 재에 완전히 오염된다.
멜버른항에 정박한 미 핵잠함 소피시호의 함장 드와잇 타워즈(그레고리 펙)와 그가 사랑하는 알콜 중독자인 농염한 여인 모이라(에이바 가드너) 그리고 과학자 줄리안(프레드 애스테어) 및 젊은 호주 해군장교 피터(앤소니 퍼킨스) 등을 주인공으로 이들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다가올 죽음을 맞는가를 센티멘털하면서도 아름답고 또 계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민들에게는 방사능에 오염돼 오래 고통하며 죽는 대신 자살용으로 알약이 공급되는데 레이스 카 드라이버이기도 한 줄리안은 약 대신 차고를 밀폐한 뒤 자기 스포츠카의 시동을 켜 개스 자살한다. 그리고 피터는 자신의 갓난 여아를 먼저 영면시킨 뒤 아내와 함께 약을 먹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소로 작별을 나눈다.
이밖에 건물은 멀쩡하게 남아 있지만 인적은 없는 유령도시와도 같은 도시 전경 등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 짓누르는 장면과 내용을 지닌 염세적인 영화다. 그러나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이 죽기 직전까지 사랑하고 낚시하고 노래 부르면서 평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성의 존엄을 잔잔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에는 호주 민요 ‘월칭 마틸다’가 끊임없이 나와 멜랑콜리한 기운을 자아내는데 이와 함께 드와잇이 조국에서 함대원들과 함께 죽음을 맞으려고 멜버른 항을 떠나 잠수하는 소피시를 바닷가에서 바라보며 전송하는 모이라(사진)의 텅 빈 뒷모습 등 콧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많다.
그런데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연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호전적 행위에 의한 핵전쟁이라기보다 사고에 의한 핵참사라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방사능 오염을 다룬 또 다른 영화들로는 일본의 ‘고질라’ 시리즈와 미국 영화 ‘뎀!’과 ‘차이나 신드롬’ 등이 있고 핵전쟁을 다룬 훌륭한 영화로는 ‘페일-세이프’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이 있다.
핵실험 장소 인근에서 영화를 찍은 뒤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암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영화가 할리웃 영화사에 가장 나쁜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정복자’(1956)다. 파란 눈의 존 웨인이 가느다란 콧수염을 한 징기스칸으로 나온 이 영화는 미군이 지난 1953년 핵실험을 한 네바다 인근 유타에서 핵실험 2년 뒤에 찍었다.
웨인과 그의 연인 역의 수전 헤이워드와 딕 파웰 감독 그리고 조연인 아그네스 무어헤드 및 페드로 아르멘다리스(자살)를 비롯해 제작진 등 총 46명이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암에 걸려 사망했다.
그런데 ‘징기스칸’은 목불인견의 영화로 나는 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보면서 건맨 웨인이 칼을 휘두르는 징기스칸으로 나와 터무니없는 대사에 볼품없는 연기를 해 콧방귀를 뀌었던 생각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호기심으로 볼 영화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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