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6월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 등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를 제작한 프레드 루스의 캐스팅 오피스에서 내게 전화가 걸려 왔다. 프랜시스의 딸 소피아가 감독할 영화 ‘섬웨어’(Somewhere-평 ‘위크엔드’판)에 나올 외국인 기자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을 용의가 있느냐는 제의였다.
나는 이에 “와이 낫”하고 할리웃에 있는 루스의 사무실엘 찾아갔다. 나와 악수를 나눈 루스는 오디션의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먼저 자신이 G.I.로 한국에 주둔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어 그는 내게 방에 설치된 비디오카메라에 대고 당신이 평소 배우들과 기자회견할 때처럼 아무 질문이나 해 보라고 시켰다. 그러나 나는 질문할 사람 없이 빈 카메라를 보고 말을 하자니 입이 열리질 않았다. 평소 연기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틀렸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루스에게 대사 한 줄 달라고 부탁해 그가 마련해 준 가상의 브래드 핏을 상대로 한 질문을 카메라에 던졌다. “당신의 팬이 많은 한국에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난 ‘영화엔 나오긴 틀렸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사무실에서 날 쓰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영화에는 나 외에도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 6명이 선정됐다.
소피아가 우리를 쓰기로 한 이유는 영화의 주인공인 스티븐 도프와 외국인 기자들과의 인터뷰 장면에 1년 내내 배우들을 인터뷰하는 우리들의 산 경험을 빌려 영화에 사실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촬영은 7월7일 오전 10시부터 HFPA의 단골 기자회견 장소인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서 시작됐다. 제작사 측은 나와 동료 회원들을 위해 작은 트레일러까지 마련해 주는 성의를 표했다. 평소 복장을 하고 분장실에서 간단한 분장을 한 뒤 촬영 장소에 들어서니 20여명의 엑스트라들이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소피아의 지시대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이 날 찍는 장면은 도프가 기자회견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뒤 나를 비롯한 동료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내용. 셔츠와 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어 조깅이라도 하러 나온 듯한 모습의 소피아는 내가 노트에 이 날 일을 기록하는 것을 보고 “당신이 그렇게 쓰는 것이 좋으니 영화 찍을 때도 그대로 하라”고 당부했다.
먼저 소피아의 지시에 따라 몇 차례의 리허설이 있은 후 “액션”이라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다. 그러나 보통 땐 거침없이 질문을 하던 우리 회원들은 막상 한 줄짜리 대사를 읽는데는 서툴러 NG를 여러 차례 냈다. 한 장면을 수 없이 찍는 바람에 나는 내 대사인 “후즈 클리오 온 유어 캐스트”를 열댓 번 정도는 말했던 것 같다.
촬영은 하오 2시께 끝났다. 1~2분 정도의 장면을 위해 4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영화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인가를 배웠다.
이 날 내가 감탄한 것은 소피아의 감독하는 태도를 보고 느낀 그의 사람됨이었다. 소피아는 독불장군식이 아닌 여러 사람과 상의해 일을 하는 감독이다. 조용한 음성으로 촬영감독과 제작자와 배우 그리고 심지어 우리에게도 의견을 물으면서 차분하고 쉽게 연출을 진행했다.
소피아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겸손하며 자상해 호감이 갔는데 수줍음이 많아 자주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소녀 같았다. 함께 있기에 아주 편한 사람이었다.
이 날 일을 통해 내가 얻은 경험은 연기가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이며 또 영화 제작은 인내와 기다림의 긴 과정이라는 것. 이 날 이후 난 영화를 볼 때 과거와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내가 이 날 반나절 일하고 받은 대가는 750달러와 영화 엔드 크레딧에 오른
‘코리안 저널리스트 H.J. Park’이라는 기록. 그런데 이 영화가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서 대상을 받았다. 내 연기 탓은 아니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섬웨어’의 시사회가 지난 연말에 열려 동료회원들과 함께 봤다. 그런데 나와 다른 동료 기자들의 앞모습은 안 보이고 전부 뒷모습만 나왔다. 나는 뒷머리와 얼굴과 상체의 왼쪽 부분이 잠시 나왔는데 대사가 안 잘린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화면에서 내 모습을 보고 또 음성을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
케빈 코스너는 그의 첫 영화 ‘빅 칠’에서 사체로 나왔지만 그것마저 편집과정서 잘려나간 것을 생각하면 나의 ‘스타 탄생’은 성공한 셈이다. 시사회 후 동료회원들이 “축하한다”고 치하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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