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모닝 글로리’ 등 몇 편의 영화 기자회견차 뉴욕엘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에 시간이 나 브로드웨이의 스튜디오 54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짧은 만남’(Brief Encounter·사진)을 보러갔다.
이 연극은 영국의 니하이 극단이 제작한 것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브스토리인 데이빗 린 감독의 동명영화를 무대에 옮긴 것이다. 각색과 연출은 니하이 극단의 예술감독 에마 라이스.
린의 영화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노엘 카워드의 단막극 ‘정지된 삶’이 원작. 모두 결혼해 자식들을 낳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두 중년 남녀 알렉과 로라가 한 작은 도시의 기차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짧은 만남 동안 사랑에 빠지나 결국 헤어져 각기 자기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지극히 단순한 얘기지만 린은 거의 진부하다시피 한 내용을 연민과 부드러운 고뇌 그리고 통찰력 있는 눈길로 묘사,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명화로 승화시켰다. 그는 두 남녀의 운명적 사랑을 통해 개인의 내면 재발견과 사회적 규범 그리고 로맨틱 괴잉과 감정적 몸 사림의 충돌을 그리면서 일상의 칙칙한 안전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요 감정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알렉과 로라의 얘기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서다. 결혼한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감정적으로 부딪쳐 부싯돌처럼 불꽃을 튀기게 되는 사람을 단 한 번 안 만나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알렉과 로라도 그런 ‘불상사’를 당한 것인데 이들의 슬픈 사랑이 신비한 분위기마저 지니는 까닭은 둘이 그 사랑을 육체적으로 소진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것을 너머선 감정의 이끌림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삶이라는 사회 규범에 자신들을 맞추기 위해 타협과 흥정으로 자신들의 부분을 잘라낸 사람들. 결국 알렉과 로라도 그들 영혼의 사망(로라는 알렉에게 “난 다시는 아무 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한다)이나 다름없는 이별을 하면서 제 갈 길들로 간다.
이 작품은 카워드의 실제 속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성애자인 그는 이 각본을 당시만 해도 동성애자를 범죄자 취급하던 1938년에 썼다. 알렉과 로라가 겪는 강요된 수치와 거짓과 기만 그리고 좌절과 분노와 상실은 모두 카워드의 속내를 말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의 심정이 알렉과 로라의 고뇌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2층 로비에서 스카치를 마시고 있는데(이런 슬픈 러브스토리는 술 한 잔 마셔야 더 절실하다) 아래서 “띵까띵까”하는 밴조 소리와 함께 옛 보드빌 쇼에나 나옴직한 노래가 들린다. 내려가 보니 옛 극장 안내원 제복과 모자를 쓴 5-6명의 남녀로 구성된 밴드(이들은 후에 연극이 공연될 때 무대 옆에서 노래하고 연주한다)가 연주한다.
엄격하고 진지하며 고요하면서도 슬프고 사무치는 작품의 내용과 분위기에 맞지 않아 기분이 상하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불길한 전조는 연극을 보면서 현실화되고 말았다.
무대 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작품 내용과 분위기를 뒷받침 해주는 필름이 계속 투영되면서 무대 위 배우들이 마치 우디 알렌의 ‘카이로의 진홍장미’에서처럼 화면을 들락날락하면서 연극과 영화의 한계를 뭉뚱그린 것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연출이다. 영화처럼 휴식시간 없이 90분간 진행된 연극은 회상식으로 전개되는 서술 순서와 대사 및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사용한 것까지 영화대로였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한 내용에 변화를 준다고 이것을 너무 어수선하게 벌려놓은 점. 카페 여주인과 역무원 그리고 카페 웨이트리스와 그의 애인 등 보조 인물들의 얘기를 찧고 까불면서 장황한 익살극처럼 늘어놓아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연극 전반부에선 그래서 알렉과 로라는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다.
조연진의 음탕하기까지 한 제스처와 대사를 비롯해 무대 옆에서 불러대는 싸구려 냄새가 나는 노래와 춤 그리고 지나친 코미디 등을 보면서 어리석고 저급한 버라이어티쇼를 보는 것 같았다. 알렉과 로라 역의 트리스탄 스터록과 하나 옐랜드의 콤비도 영화에서 트레버 하워드와 실리아 존슨이 자아낸 하모니에 턱 없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또 둘의 태도가 너무 공격적인 것도 눈에 거슬린다.
알렉과 로라는 춤추고 노래까지 하는데(이 연극은 뮤지컬이라고 불러도 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들이 못 이룰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몇 번이나 자문했다. ‘아이 원 마이 머니 백’.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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