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돌아온 나의 피난시절 고향 부산 땅을 다시 밟으니 가슴에서 눈물이 흘렀다. 지난 달 해운대서 열린 부산 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동안 나는 아내를 데리고 며칠간 6.25 피난살이를 하던 부산의 추억의 장소들을 찾아다녔다. 회한과 그리움이 핏덩이처럼 가슴에 걸려 내내 속으로 울면서 다녔다.
난 그 때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가 북에 납치된 뒤 어머니와 함께 가족이 남보다 늦게 1.4후퇴 때 남하해 셋방을 얻어 든 곳이 범일동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범일동역에서 내려 장터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 내가 살던 곳을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갔다. 집 앞 로터리는 아직 그대로 있는데 집 옆 개천인 범천은 오래 전에 복개돼 도로가 되었다.
범천의 일부는 아직 복개가 안 돼 물이 흐르고 있는데 나의 소년시절은 이미 이 물을 타고 모두 과거로 흘러 내려갔을 것이다. 우리 집이 있었을 만한 곳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었지만 그건 마치 과거를 잡아보려는 허무한 짓이었다.
이어 역시 길을 물어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있던 삼일극장을 찾아갔다. 극장은 헐리고 메디칼센터 건축이 한창이었다. 나는 이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봤는데 극장 뒤 변사석의 변사 옆에 앉아 무성영화 웨스턴을 보면서 타향살이 서러움과 고독을 달랬었다.
불만 꺼지면 나는 나만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는데 그것이 버릇이 되어 지금까지도 나는 영화를 보고 또 쓰고 있다. 삼일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아, 조금만 더 일찍 올걸’ 하고 아쉬워했다.
다음 날은 어머니가 장사를 하던 부산 도심의 용두산 밑에 있는 광복동과 남포동을 찾아갔다. 광복동은 부산의 명동으로 이곳에 현인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의 오빠가 장사치기로 있던 국제시장도 있다.
길에서 500원짜리 오뎅을 사 먹으며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 좁은 복도 같은 국제시장 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를 불렀다. 그런데 부산에는 러시안들이 많았다.
광복동에서 길 하나 건너면 부산의 명물 자갈치 시장이 있다. 피난시절 토박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리던 고래고기집을 지나 자갈치 시장 안에 들어가 멍게와 해삼과 전복회를 곁들여 소주를 마시는데 저만치 영도다리가 보인다.
현인이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드높이 떴다”라며 피난살이의 고적과 막막한 심정을 노래한 영도다리는 지금 보수복원 공사 중이었다. 영도다리는 꺼떡꺼떡하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다리였는데 신 영도대교가 세워진 뒤 활동을 중지했다고 한다. 이번에 보수공사가 끝나면 다시 옛날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될 것이라고 횟집 아주머니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알려줬다.
구 영도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부산진역으로 갔다. 남인수가 노래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바로 다음에 있는 부산진역은 우리 가족이 4년간의 피난살이 끝에 역시 남보다 늦게 귀경했을 때 이용한 정거장이다.
그런데 정거장은 폐쇄되고 시계 빠진 시계탑 모습이 을씨년스런 역사만이 남아 있다. 삼일극장도 폐쇄되고 부산진역도 폐쇄된 것이 마치 이제 나이 먹어 소년기를 되찾아온 나의 폐쇄와도 같이 느껴지면서 모든 것을 끝내주는 세월의 힘에 무기력감을 느꼈다.
하루 쉬고 다음 날에는 나의 텐트 피난학교가 있던 용두산엘 올라갔다. 그 때 용두산은 진흙뻘이어서 비만 오면 온 산이 새빨간 진흙탕이 되곤 했다. 어느 날 방과 후 귀가하다가 진흙뻘에 미끄러져 온몸이 흙에 범벅이 된 것을 담임선생님의 사모님이 깨끗이 씻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마침 용두산의 부산타워에서는 6.25 때 미 공병으로 근무한 클리프 L. 스트로버스가 찍은 ‘1950년대 부산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겉에 영어로 Michigan이라고 쓴 셔츠를 입은 고아소년과 목판에 양담배와 검과 초컬릿을 놓고 파는 아주머니의 사진들이 나를 과거로 실어다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못 잊을 것은 손을 높이 든 채 달려드는 아이들 머리 위에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든 누런 봉투를 들어 올린 채 웃으며 서 있는 G.I.의 모습(사진). 그 아이들이 바로 나였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자니 육신이 불편했다.
용두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은 이제 전쟁의 아픔을 말끔히 닦아낸 원기 왕성한 모습이었다. 더 이상 나이 먹은 나의 슬픔과 고독과 간난으로 가득했던 가슴이 머물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과거의 무게 탓일까,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허탈했다.
6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여객은 늘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돌아가야 한다는 귀소본능 사이에서 시달리게 마련인가 보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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