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부터 15일까지 해운대에서 열린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내가 얻은 평생 간직할 만한 수확은 한국 영화계의 산 증인이자 고전이라 부를 감독과 배우들을 만난 것이었다.
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한국 영화계의 대부 정창화 감독(LA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초대로 지난 9일 영화제 행사중 하나로 열린 김지미씨(LA 인근 패사디나 거주)의 회고전에 참석했다.
회고전에 가기 전 정 감독과의 약속장소인 영화제 본부가 있는 그랜드 호텔 로비에 도착하니 정 감독이 웬 키 큰 미남 신사와 함께 서 있었다. 이 미남 신사가 ‘단종애사’를 비롯해 생애 총 2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과거 한국 스크린을 주름 잡던 서구적 마스크의 윤일봉씨였다. 난 너무나 반가워 그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는데 그는 이제 나이는 좀 들어보였지만 여전히 늠름하고 잘 생겼다.
회고전이 시작되기 전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윤씨는 자신과 과거 한국 영화계에 대해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용산고에 다닐 때 KBS의 전신인 HLKA의 성우(‘빨간 마후라’)로 출발한 윤씨는 내가 자꾸 “여전히 미남”이라고 감탄하자 “옛날에는 큰 키와 서구적 마스크가 오히려 불리했다”며 웃었다.
그의 고향인 충청도의 양반 자세를 지닌 직선적이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을 지닌 윤씨는 나의 “왜 당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거짓말하기 싫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과거사를 얘기하자면 다른 많은 영화인들의 단점과 비리와 어두운 점들까지 솔직히 털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라고 한다.
김지미씨 회고전 연회장에 들어서니 저만치서 남궁원씨와 윤양하씨가 서 있다. 둘 다 여전히 잘 생겼다. 특히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 불린 남궁씨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이 두 사람 곁에 윤일봉씨가 서니 ‘올드 미남 삼총사’의 멋있는 자태에서 흘러간 한국 영화사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많은 액션영화에서 조연으로 나온 이해룡씨(한국 영화배우협회 부이사장)와 한국의 브리짓 바르도였던 최지희씨도 보이고 이들에 비하면 신인인 장미희와 강수연도 참석, 언니 지미를 축하해 줬다. 나는 김지미씨와는 구면이어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회고전을 축하했다.
회고전에서는 요즘 한국의 젊은 배우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 감독은 “몇년 전 김승호씨 회고전 때도 마찬가지였다”면서 과거를 외면하는 젊은 세대를 안타까워했다.
이 날 진짜 재미있고 감회 깊었던 자리는 회고전 후 정 감독과 그의 동료들인 김기덕 및 김수용 감독(사진 오른쪽부터)과의 바닷가 포장마차 회식이었다.
김수용씨는 지난 60년대와 70년대 ‘안개’를 비롯해 생애 총 100여편의 영화를 만든 문예영화의 장인. 지난 1986년 영화 ‘허튼소리’가 검열 당국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는데 항의, 메가폰을 내던져버렸다.
셋 중 막내인 김기덕씨(‘나쁜 남자’의 작은 김기덕이 아님)는 역시 지난 60년대 모두 신성일과 엄앵란이 공연한 ‘가정교사’와 ‘맨발의 청춘’ 등을 만든 청춘물의 대표적 감독.
밤 파도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옛날 한국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대학생 때 본 영화들을 만든 장인들과 이역만리 타향인 해운대에서 술자리를 같이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감개가 무량해 거푸 마시는 ‘50세주’에도 취하지가 않았다.
회식 대화의 리더는 거침없는 달변의 김수용씨. 어찌나 말을 잘 하고 위트와 유머가 있는지 웬만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뺨칠 정도.
김 감독은 김지미씨의 미인론을 비롯해 동석한 과묵한 정 감독과 김지미씨의 전 남편 홍성기 및 신상옥 감독 등이 속했던 한국 영화계의 태두 중 한 사람인 최인규 사단 또 5.16 쿠데타 후 이정재와 함께 사형 당한 깡패 임화수의 김희갑씨 구타사건(실제보다 과장됐다고 함) 그리고 요즘 한국 영화계 젊은 세대의 올드 타이머에 대한 ‘80년대 이전 영화인은 가라’라는 배타적 견해 등에 관해 마치 영화사 강의를 하듯 청산유수식으로 이어나갔다.
김 감독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마지막 작품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나 비극적 종말을 맞는 모자와 부녀의 얘기 두 가지로 모두 라스트신은 화면에 피가 뿌려질 것이라고.
한편 김기덕 감독은 김수용씨가 말을 잠깐 쉬는 사이 자신의 대표작인 ‘맨발의 청춘’에 관한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깡패와 외교관 딸의 비련을 그린 영화에서 빈부 차가 눈에 띄게 묘사됐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가위질을 당했다는 것.
두 감독의 옛날 얘기를 모범생처럼 경청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어섰다. 한국 영화사의 산 역사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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