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노릇 구워진 녹두빈대떡, 동글동글 지져진 동그랑땡, 울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생선전, 나란히 줄 맞추어 색 곱게 단장한 산적, 머리까지 그대로 달린 닭 한 마리에 큰 엄마는 예쁜 당근 꽃을 얹어주시고, 제사상 때야 볼 수 있는 커다란 생선들이 노랗고 하얀 달걀지단 옷을 입고 얌전히 누워있다. 뿐만 아니라 늘 이맘때면 과일가게에서 선발되어 온 가장 커다란 과일들이 모양을 내고 앉아있고, 약과와 한과들이 멋을 내고 접시에 빌딩처럼 겹겹이 쌓여 앉았다. 또 다른 작은 방에서는 작은 엄마와 엄마 그리고 막 건너오신 큰 엄마가 함께 모여 앉아 전을 지지며 맛난 이야기도 함께 지지고, 동생들은 추위도 잊은 채 밖에 나가 논다. 그 다음은 안방 창을 열어 둔 채로 남자 여자 따로 제사를 모시며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 해 있었던 가족 일들을 조상님께 보고하고 부탁을 하셨다. 올해는 자식들이 대학에 모두 잘 들어가게 해달라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시아버님께 말씀하시고,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 제일 큰 손자인 정연이가 올 해는 시집을 가니 잘 봐 달라고 그리 말씀하셨던 그 설이 나에게는 결혼 전 할아버지가 함께 계셨던 마지막 설이었다.
잠시 후 제사상에 놓인 음식들이 하나둘 차례 상에서 내려오면 우리 손자들은 서로 제일 맛나보이던 먹을거리 하나씩을 입에 물고, 또 즐거워했었다. 그러며 모두 반주를 한 모금씩 나누고, 내 어머니는 항상 깍은 밤을 맛나게 드셨고, 나와 동생에게는 늘 곶감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색 현란한 붉은 한과 사탕에 현혹이 되어 덥석 입에 물고는 이내 그 맛이 이상하여 내려놓고는 엄마 말씀을 들었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차려진 아침상 앞에 모두 둘러앉아 작은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시는 토란국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둣국을 온가족이 입맛대로 둘러 앉아 먹으며 그렇게 우리의 설은 무르익어 갔었다. 늘 맛나던 할머니의 달달하고 시원한 김치도 베어 물고, 주홍빛 물김치도 떠먹고, 노릿하게 구워진 전도 하나씩 맛보며 모두들 밥상에서 그렇게 웃었었다. 그 날은 큰 상, 작은 상 나누어 서로 조금씩 비켜 앉으며 다닥다닥 엉덩이 붙여 앉아 하는 이야기가 먹는 그 한 입처럼 그리 맛있을 수 없었다.
모두 배불리 먹는 모습에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많이 먹으라고 흐뭇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나는 제일 큰 소리로 너무 맛나다 할머니께 웃으며 보고했었다. 그렇게 얼굴도 엉덩이도 맞붙여 앉아 먹던 우리의 설 밥상이 물러가면, 누군가 깎아 내어온 과일 한 접시와 할머니가 막 빚어 올리신 김이 나는 송편과 할머니께서 만드신 식혜가 추운 베란다에서 대접째 담겨 나오면 우리 모두는 살얼음이 떠 있는 식혜를 넘기며 또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대었다. 그렇게 웃다보면 우리 손자들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돌아온다. 세배를 하고 덕담도 듣고, 용돈까지 생기던 맛난 설.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흐뭇한 웃음에 넘치는 따뜻한 먹을거리에 모두 오랜만에 얼굴 마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추석특집을 보았었다. 그 설이 내가 막 결혼을 하고 난 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셨던 나의 마지막 설이었다. 늘 우리 정연이는 재미난 이야기를 할아버지한테 잘 해준다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 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이렇게 낳아 키워주신 엄마에게 항상 감사하라고 말씀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계시던 나의 마지막 설이었다. 젊은 시절 황해도 해주에서 피난 내려오신 나의 할아버지는 그 설날까지 당신 며느리와 자식들에게 차례 상을 준비하는 간간이 “날래 날래 하라우” 하시며 나직한 목소리로 자상하게 이야기하셨다. “날래 날래 하라우.” 이는 빨리빨리 하라는 이북 말투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참 반공교육을 받던 나는 이런 할아버지가 간첩이신가 하고 의심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부모님과 형제를 그리워하시던 그냥 이북에서 내려오신 내 할아버지셨다. 그 할아버지께서 계시던 그 설이 오늘 너무도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의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날래 날래 하라우.”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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