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등학생일 때 필독서가 몇 권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피어 프레셔 때문에 안 보면 안 될 책이 한국 섹스소설 ‘벌레 먹은 장미’와 프랑솨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었다. 나는 지난 달 사강이 69세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이 영원한 청춘이 나이를 먹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이 18세 때 쓴 데뷔작으로 대뜸 전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이 짧은 소설은 17세의 세실이 바람둥이 아버지가 마침내 마음을 잡고 결혼하려 하 자 음모를 꾸며 여인을 자살하게 만든다는 통속적인 내용 이다.
작가와 주인공이 모두 틴에이저여서 그때 같은 또래였던 우리들은 이 책에 유달리 매료됐었다. 사강이 배우처럼 예쁜 프랑스 여인인 데다가 세실 역시 예쁘고 반항적이며 비도덕적인 청춘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남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사강과 세실을 한 사람으로 여기며 동경했었다.
당시 우리는 사르트르와 카뮈 등 실존주의자들에 탐닉할 때여서 사강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사강의 책을 읽은 우리들은 책 제목이 슬픔을 보내는 인사가 아니라 그것을 맞는 인사라며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한마디씩 했었다.
내가 세실을 직접 목격한 것은 동명의 영화(1958·사진)를 보았을 때였다. 세실로는 짧은 헤어스타일의 진 시버그가 나왔고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인으로는 각기 데이빗 니븐과 데보라 카가 나왔다. 프렌치 리비에라의 경치가 황홀했는데 사강과 시버그가 모두 짧은 머리여서 영화를 본 뒤로 내게는 사강과 세실과 시버그가 동일인물이 되어버렸다. 영화에는 전설적 샹송 가수 쥘리엣 그레코가 나이트클럽 가수로 나와 노래 부 른다.
사강(본 성이 콰레즈였던 사강은 이 성을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에서 따왔다)의 소설로 또 유명한 것은 그의 두번째 작품 ‘어떤 미소.’ 데뷔작처럼 이 소설도 삼각관계의 연애소설인데 사강은 자기 작품들에서 무상한 사랑이 영혼에 남기는 쓰라린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강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고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역시 프렌치 리비에라와 파리를 무대로 전개되는 ‘어떤미소‘(A Certain Smile·1958)도 영화화됐다. 애인과 헤어진 젊은 여인 도미니크(크리스틴 카레르)가 자기를 친절히 대해 주는 여인(조운 폰테인)을 배신하고 그의 바람둥이 남편(로사노 브라지)과 애정행각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소설만큼 정열적이지 못한데 영화보다 자니 마티스가 직접 나와 노래하는 주제가(오스카상 후보)가 더 유명하다. 그런데 사강은 이 소설처럼 20세 때 자기보다 20세 연상인 출판업자 기 숄러와 결혼했으나 2년만에 이혼했다.
‘슬픔이여 안녕’이 고등학생 때 내게 어필했다면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의 내 가슴에 소슬하게 들어와 앉는 글이 사강의 또 다른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Aimez-Vous Brahms?)이다. 사강의 주제인 ‘사랑과 고독’을 무드 짙게 다룬 역시 삼각관계의 러브스토리.
이 글은 1961년 잉그릿 버그만과 이브 몽탕 그리고 앤소니 퍼킨스 주연의 ‘이수’(Goodbye Again)라는 흑백영화로 만들어졌다. 브람스의 음악이 작품의 무대인 파리와 초가을 계절과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쓸쓸한 사랑의 영화로 이 계절에 보면 옷깃을 올리게 될 가장 가을적인 작품이다.
40세의 아름다운 실내장식가 폴라와 그의 바람둥이 애인 로제 그리고 이들 사이를 파고들어 폴라의 사랑을 받아내나 결국 폴라로부터 버림받는 젊은 미국 청년 필립이 엮는 사랑의 단조 변주곡이다.
필립은 폴라에게 “당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며 사랑의 제스처를 보내는데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의 느리고 게으른 한숨처럼 멜랑콜리한 주제가 계속해 들려온다. 그리움과 애수가 깃든 아름다운 멜로디가 풍성한 하머니에 싸여 “라 라 라, 라 라 라” 하며 흐르는데 듣고 있노라면 영육이 상심과 고독감에 비를 맞은 듯해 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사르트르를 좋아하고 또 인간의 항구적인 고독에 집착했던 사강은 생전 돈을 버는 대로 다 쓰면서 위스키와 코케인을 즐기며 빠르게 살았다고 한다. 소설 같은 인생을 살다간 여인이다. 그런 사강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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