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레이크 타호엘 다녀왔다. 호수 인근에 사는 친구 탐을 만나 칵테일을 곁들인 우정의 연례 방문 행사였다.
내가 탐(나의 어머니는 톰이라 불렀다)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 경기도의 한 중·고등학교에서였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그와 나는 모두 영어를 가르쳤었는데 나는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탐에게 물어보면서 둘 간의 교분이 시작됐다. 둘이 모두 책과 고전음악과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정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그후 탐이 귀국한 뒤에도 우리는 서신교환으로 우정을 잊지 않다가 1980년 내가 미국에 오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내 영어이름 H.J.는 내가 미국에 오자마자 탐이 지어준 것이다.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견우와 직녀처럼 번갈아 가며 서로를 찾는데 지난해에 탐이 LA에 내려왔기 때문에 올해는 내가 올라갔던 것이다.
아침에 공항에 마중 나온 탐은 내게 “야, 지금쯤 이 세상 어딘가는 칵테일 시간인 오후 5시일 거야”라면서 오전 칵테일을 제의했고 난 그것에 기꺼이 응했다. 칵테일을 운치 있게 마시자며 우리는 레이크 타호로 갔다. 호숫가는 주말을 맞은 휴양객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들을 힐끔 힐끔 훔쳐보다가 호수로 눈길을 돌리니 제트스키와 모터보트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원하다.
이어 우리는 칵테일과 대화의 장소를 탐의 집으로 옮겼다. 우리는 밤이 돼 잠자리에 들 때까지 스카치와 보드카와 테킬라와 포도주를 고루 마시며 옛날 한국 얘기와 나이 먹는 것과 영화와 이번 선거서 부시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탐과 나는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헨델 그리고 라이오넬 햄튼을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탐은 한국시절 얘기를 하면서 한국말로 “막걸리”와 “빈대떡”이 먹고 싶다더니 한국에서 연탄불에 구워먹던 “돼지 갈비” 맛 지금도 못 잊겠다고 입맛을 다셨다.
내가 암청색의 산상호수 레이크 타호를 처음 찾았던 것은 1987년 9월이었다. 서울 본사의 특집 시리즈 ‘세계영화 기행’ 중 한 작품인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1951·사진)의 현장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1960년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한 타호의 타호라는 말은 와쇼아메리칸 인디언의 말로 ‘호수의 변두리’를 뜻하는 ‘다 오 아 가’를 잘못 발음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당시 방년 19세의 리즈 테일러가 나오는 흑백 명화 ‘젊은이의 양지’는 미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디어도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이 원전이다.
이 영화는 수영복 제조공장서 일하는 가난하고 무식한 청년 조지 이스트맨과 재벌집 딸로 눈이 따가울 정도로 예쁜 앤젤라 빅커스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이자 인간 영혼에 관한 힘찬 분석이다. 레이크 타호에는 앤젤라의 별장이 있는데 영화에서 앤젤라가 뜨거운 태양 아래 수상스키를 타며 해맑게 웃는 장면이 나온다.
레이크 타호는 조지와 앤젤라의 사랑의 데이트 장소이지만 그런 행복의 장소로서보다 조지가 저지른 ‘행위 없는 살인’의 현장으로서 시퍼런 살의를 품고 있다. 조지는 앤젤라를 사귀기 전에 만난 여공 앨리스(셸리 윈터스)가 자기 아이를 임신한 채 같이 살자고 칭얼대자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조지는 달이 뜬 밤에 앨리스를 보트에 태우고 호수 한 가운데로 나아가나 차마 죽이지를 못하는데 둘이 말싸움을 하다 배가 뒤집어지면서 모두 물에 빠진다. 그리고 조지는 혼자 헤엄쳐 나온다.
조지는 비록 자기 손으로 앨리스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고 그 죄값으로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된다. 가지지도 배우지도 못한 조지는 ‘양지의 한 자리’를 갈망하다 자기 야망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불쌍한 녀석.
레이크 타호는 또 ‘대부’ 속편에서 마피아 두목이 된 마이클(알파치노)의 저택을 찍은 곳이다. 마이클이 부하를 시켜 배신자 형 프레도를 살해한 곳도 이 호수 위에서다. 이 저택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있었는데 지금은 보트정박장만 남겨둔채 헐리고 그 자리에 수백만달러짜리 콘도들이 들어섰다.
돌아오는 날 오후가 되니 천둥번개가 치고 한 여름 눈까지 내렸다. 우리는 내년에 LA서 보자며 헤어졌는데 내년에 탐이 내려오면 레돈도비치에 가서 생선찌개에 막걸리를 먹일 작정이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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