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테너가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를 듣고 좋아하게 되었던 노래가 미남 주세페 디 스테파노가 부른 푸치니의 ‘별은 빛나건만’(오페라 ‘토스카’)이었다. 고등학생 때 명동에 있던 지하 음악감상실 돌체에서 들었는데 짧지만 강렬하고 비장미가 흐르는 스테파노의 음성이 단숨에 어필해 왔 었다.
옥에 갇힌 카바라도시가 “별들은 밝게 빛나고 그윽한 향기는 대기에 스며드네”라고 중얼대듯 시작하는 노래는 이윽고 “오 달콤한 입맞춤이여 나른한 애무여”라며 토스카에 대한 그리움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루다가 통곡으로 끝난다. 테너 음성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아리아다.
그 뒤로 마리오 델 모나코와 프랑코 코넬리 같은 다른 테너들의 노래도 즐겨 듣게 됐는데 이들은 모두 드러매틱 테너들이다. 그러다가 이들보다 늦게 듣게 된 테너들이 유시 뵤를링과 베니아미노 질리였다. 나는 처음에 이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야 참 목소리가 곱기도 하구나”하고 감탄했었다. 이 둘은 리릭 테너들인데 드러매틱 테너 못지 않게 높이와 폭을 지녔으면서도 문자 그대로 서정적 음색이 유난히 고운 것이 특징이다.
뵤를링의 목소리가 은빛으로 청아하다면 질리의 그것은 따스한 황금빛인데 나는 요즘도 둘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누구 목소리가 더 좋지, 누가 더 곱지’하면서 오락가락하곤 한다.
내가 스웨덴 태생의 토실토실한 얼굴을 한 뵤를링(사진) 때문에 좋아하게 된 아리아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에서 돈 오타비오가 부르는 ‘일 미오 테조로’이다. 돈 오타비오가 “나의 보석이여, 나 대신 사랑하는 아나에게 말해주오”라며 약혼녀 도나 아나를 위해 부르는 이 노래는 아마도 테너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 중의 하나일 것이다. 뵤를링은 1930년 돈 오타비오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는데 그가 부르는 ‘일 미오 테조로’는 달콤한 한숨처럼 간지럽다. 실제로 뵤를링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아리아를 들을 때마다 그의 노래를 부르는 입 모양이 이랬으리라하고 상상하곤 한다. “오 소 스위트”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노래를 포함해 뵤를링이 1955년 9월 카네기홀에서 가진 아리아와 가곡 리사이틀을 생으로 녹음한 음반 ‘다시 발견한 유시 뵤를링’(Jussi Bjorling reDiscovered)을 뒤늦게 샀다. RCA가 발행한 이 디스크는 처음으로 그의 리사이틀을 완전 수록한 것인데 전에 레코드로 나오지 않았던 9곡의 아리아와 가곡이 담겨져 있다.
디스크는 청중들의 박수소리에 이어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로 시작된다. 힘차면서도 엄숙하고 비감하다. 이런 분위기는 슈베르트의 ‘송어’를 부르면서 햇볕 찬란한 야외로 즐거운 소풍을 떠난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노래지만 송어들이 쾌청한 날 실개천 맑은 물 속에서 햇볕을 몸에 받으며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맑고 밝은 음색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에 가서는 다시 어둡고 슬픈 빛을 띠는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듣는 사람을 고독케 한다.
뵤를링은 요란한 박수갈채와 함께 앙코르를 외치는 청중들에게 “여러분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면서 친절히 곡명을 소개해 디스크를 듣는 나도 리사이틀에 참석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비제의 ‘꽃노래’(오페라 ‘카르멘’)는 간절하고 마스네의 ‘꿈’(오페라 ‘마농’)은 정말 꿈꾸는 듯하다. 그러다가 급박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어머니 안녕”(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하며 하늘을 찌르는듯한 고음으로 울부짖을 때면 비장하기 짝이 없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뵤를링의 또 다른 노래가 토스티의 ‘이상’. 영혼이 고양되는 평온함을 경험하는데 고요한 끝맺음이 절묘하다. ‘별은 빛나건만’과 ‘그대의 찬 손’(푸치니 오페라 ‘라보엠’)등 오페라 아리아와 북구와 독일 가곡이 담긴 디스크의 또 하나 예쁜 노래는 포스터의 ‘금발의 제니’. 여름 공기를 쐬는 금발의 감촉이 느껴지는데 외국인의 다소 어색한 영어 발음이어서 더욱 귀엽다.
뵤를링의 리사이틀 18번지 ‘마파리’(플로토우 오페라 ‘마르타’)와 둘 다 감칠맛 나게 아름다운 ‘오 파라디조’(마이어베르 오페라 ‘아프리카의 여인’)와 비제의 ‘로맨스’(오페라 ‘진주조개잡이’)가 함께 수록되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래의 날개를 타고 딴 세상에서 노닐다 오는 기쁨을 주는 음반이다.
뵤를링은 술꾼 오페라 스타로 남달리 가곡을 많이 부른 힘과 깊이와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음성의 소유자였는데 1960년 생의 절정기에서 49세로 요절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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