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94세로 타계한 명장 엘리아 카잔은 생전 명성과 오명을 한 몸에 모두 지녔던 사람이다. 그는 두 번의 오스카상을 받았고 1983년에는 미정부가 주는 케네디 센터 생애업적상을 그리고 1999년에는 오스카 생애업적상을 받았다. 영화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도 없다.
그러나 카잔의 영광은 그가 죽은 뒤인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배신자라는 오명의 그늘에 항상 가려져 있다.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그는 1952년 미 연방하원의 반미활동조사위에 출두, 공산당과 관계했던 동료 영화·연극인들의 이름을 고자질했다. 이로써 그는 죽을 때까지 내내 ‘배신자’라는 낙인을 몸에 새긴 채 지내야 했다.
그리스계 이민자의 아들도 브로드웨이에서부터 연출활동을 시작한 카잔은 ‘배우들의 감독’이라 불리며 사회적 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여러 편 만들었다. 미국 내 반유대주의를 다룬 ‘신사협정’(사진은 그가 이 영화로 오스카상을 받은 모습)과 미디어의 대중 우민화를 풍자한 ‘군중 속의 얼굴’ 그리고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에 관한 드라마 ‘거친 강’ 및 흑백 문제를 다룬 ‘핑키’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 ‘워터프론트’(1954). 뉴욕 항구의 부두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깡패집단을 폭로한 이 영화는 가차없이 사실적이고 격렬한 걸작으로 오스카 작품 및 감독상 등 모두 8개의 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카잔이 영화 주인공 테리 말로이(말론 브랜도)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 점. 깡패 중 하나인 테리는 동료들의 불법행위를 폭로하고 영웅이 되는데 카잔은 테리의 이런 동료 배신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2년 전 자신의 청문회에서의 고발행위를 옹호하고 있다. 카잔은 한 기자회견에서 테리가 ‘난 내가 한 일이 기뻐, 너희들 잘 들어, 내가 한 일이 기쁘단 말이야’라고 외친 것은 바로 나의 말이다고 말했다.
내가 카잔 같은 사람들의 고발에 의해 직접 피해를 입었던 각본가 겸 감독 에이브러햄 폴론스키를 만났던 것은 1999년 1월 LA 영화비평가협회의 연례 만찬에서였다. 우리는 그 해 폴론스키에게 생애업적상을 주었었다. 폴론스키는 권투선수의 도덕성을 다룬 강렬한 드라마 ‘육체와 영혼’(1947)의 각본으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뒤 이듬해 어둡고 치열한 범죄영화 ‘악의 힘’의 각본을 쓰고 감독으로 데뷔, 장래가 촉망되는 할리웃의 신예로 부상했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밝은 미래는 당시 공산당원이었던 폴론스키가 1951년 반미활동조사위에서 자신과 공산당과의 관계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끝장이 났다. 그런데 우리가 폴론스키에게 상을 준 그 해 카잔이 오스카 생애업적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할리웃은 이를 둘러싼 찬반논쟁으로 시끌시끌했었다.
나는 폴론스키가 수상 소감에서 내가 O.S.S.대원으로 2차대전에 나갔을 때 전선에서 친구를 배신한 카잔 같은 인간을 만났더라면 그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독설을 내뱉던 모습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 폴론스키도 카잔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폴론스키는 저 세상에서도 카잔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한국에서도 해방 직후 작가와 예술가 사이에 사상을 둘러싼 충돌과 배신과 고발이 있었지만 과연 한 사람의 업적과 윤리성은 따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 카잔이 죽은 뒤 평소에도 카잔을 옹호하던 LA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케니 투란은 다시 한번 그를 옹호하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광신도들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 글이 나간 후 이에 대한 찬반론이 실렸는데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한 각본가는 카잔을 용서받지 못할 자로 저주한 반면 그를 옹호하는 한 투고자는 카잔이 공산주의에 실망, 그의 해악을 막기 위해 한 고발행위는 영웅적 행위라고 말했다.
2차대전 후 미국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우려에서 비롯된 의회의 반미활동 조사는 혼란한 시대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들과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수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할리웃 역사의 치욕적인 한 부분으로 할리웃은 지금까지도 당시에 입은 상처와 고통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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