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D.J.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두 알지만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이 사람들은 희귀종이었다. 음악감상실이나 음악다방에 마련된 부스 안에서 팝송을 틀어주던 사람들인데 그때 갈데라곤 극장이나 음악감상실과 다방 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D.J.는 하나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음악감상실의 D.J.들은 당시 물 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양키 팝송의 제목과 내용과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을 꿰뚫듯이 알고 있어 우리들은 그들을 팝송의 백과사전처럼 여기며 부러워 했었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사람들은 돌체, 세시봉, 디 쉐네, 라 스칼라 같은 음악감상실을 한 두어번 씩은 드나들어 봤을 것이다. 나도 이틀이 멀다하고 이곳들을 찾아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니 노래에 젖고 영어공부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음악감상실을 졸업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 준 음악감상실이라 할 수 있는 음악다방엘 일주일에 서너번은 들렸었다. 나의 단골다방은 광화문에 있던 지하다방 ‘여심’이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남은 마음이라는 다방이름이 좋았고 팝송의 레퍼터리도 다양해 뻔질나게 찾아가곤 했다. 다방 D.J.는 손님들이 메모지에 적어 레지를 통해 건네 주는 신청곡을 틀어 주었는데 그때 나의 18번 신청곡은 컨트리싱어 단 깁슨이 부르는 ‘시 오브 하트브레이크’였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가끔 들으며 추억에 잠기곤 하는데 이 가수 외에 내가 유난히 좋아한 가수들은 바비 다린과 브렌다 리였다. 다린이 부르는 ‘18송이의 장미’와 ‘딩스’및 ‘로스트 러브’ 그리고 리가 부르는 ‘애즈 유주얼’과 ‘올 얼로운 앰 아이’같은 노래들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 속에서 떠돌고 있다. 두 사람과 함께 바비 라이델과 스티브 로렌스 그리고 티미 유로 등의 노래를 즐겨 들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모든 가수들의 노래를 다 좋아한 팝송 미치광이였다. 끼니를 굶으면서 음악감상실과 다방엘 다닐 정도였다.
이 D.J.의 팝문화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 왕년의 명 D.J. 최동욱씨다. 시그널음악인 버트 캠페르트악단의 ‘댓 해피 필링’과 함께 그가 동아방송에서 매일 하오3시부터 4시까지 진행했던 ‘세시의 다이얼’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프로다. 최 D.J.는 전화로 신청곡을 받아 팝송들을 틀어 주었는데 그야말로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이 프로는 한국에 팝송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을뿐 아니라 노래를 듣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당시만해도 길바닥이 금으로 깔린 줄 알았던 미국의 틴에이저들의 사랑스타일과 생활 및 문화정경을 간접적으로 소개해 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프로가 미국 팝송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천박한 양키문화의 동경자로 만들어 놓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무언가 멀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알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공과야 어쨋던지 지금 50대 넘어선 사람치고 ‘새드 무비’나 ‘오, 캐롤’ 그리고 ‘다이애나’를 들으면서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추억이라는 흔치 않은 심정의 여분을 마련해 준 음악프로였다.
이 추억을 현재형으로 즐긴 시간을 얼마전 가졌었다. 최씨의 저서 ‘가짜 영어 바로 잡기’의 출판기념회의 제2부는 ‘세시의 다이얼 공개 감상회’로 진행됐다. (사진) 최 D.J.가 자리에 참석한 올드 팬들로부터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아 틀어 주었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이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세월과 마음은 꼭 함께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 쉐네서 만나 연애 끝에 결혼 했다는 한 부부는 이 공개 감상회에 참석하려고 먼데서 왔는데 둘은 그들을 접속 시켜준 리틀 페기 마치의 노래 ‘아 윌 팔로우 힘’을 신청해 들으며 옛날로 돌아 가고 있었다 .
가수 위키 리, 블루 벨스의 멤버였던 서양훈 투 코리언스의 한 쪽 손창철 및 작곡가 전재학씨 등을 비롯해 다른 여러 팬들과 최 D.J.와의 타임머신을 타고 치룬 재회의 자리는 가슴 속이 촉촉이 젖어드는 아름답고 흐뭇한 시간이었다. ‘스패니쉬 아이즈’, ‘아이 러브 하우 유 러브 미’, ‘포겟 힘 나우’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그리고 ‘새드 무비’를 듣다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코리아타운내 갤러리아 쇼핑센터서 ‘초이스 레코드’를 경영하는 최씨는 요즘도 우리 신문의 자매회사인 라디오서울 (AM1650)에서 매일 하오 3시부터 ‘세시의 다이얼’을 방송하고 있다. 그가 만년 D.J.이기를 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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